[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풀꽃이름] 매발톱꽃, 며느리밥풀, 분꽃, 은방울꽃, 범꼬리

푸레택 2022. 1. 27. 21:18

[풀꽃이름] 매발톱꽃 / 임소영

풀꽃이름은 보통 예쁘고 순한데, '매발톱' 같은 겁나는 이름도 있다. '매발톱'의 존재는 1990년대 초 한-중 수교 이후 백두산 생태를 관찰한 식물 애호가들 덕분에 널리 알려졌다. '매발톱꽃'이라는 이름은 꽃잎 뒤쪽에 있는 '꽃뿔'이라고 하는 꿀주머니가 매발톱처럼 생긴 것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곳에 피어 '하늘매발톱', 산골짝에 피어 '산매발톱/골짝발톱', 한자말로 '누두채'(漏斗菜)라고도 한다. 풀꽃이 아닌 '매발톱나무'는 다른 종류인데, 줄기에 날카롭고 긴 가시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오늘날 매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동물과 식물이 하나로 이어졌던 옛사람들의 통합적 자연을 그 이름에서 본다. 매발톱이 오므리며 꽃으로 내려앉고, 꽃은 발톱을 세우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 매발톱의 뾰족한 꽃뿔을 보면서 '무얼 잡으려고 허공을 움켜쥔 채/ 내려놓을 줄 모르느냐/ 그렇게 손톱 발톱을 치켜세운다고/ 잡혀지는 허공이더냐'는 글(김승기 시 '매발톱') 구절을 되새겨 본다. 한때는 허공마저 움켜잡자는 치열한 삶이었으나 결국은 손발톱 매섭게 세운 일의 무의미를 깨닫게 되는 삶이 매발톱처럼 두렵다. 글=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한겨레]

[풀꽃이름] 며느리밥풀 / 임소영

오래 전에 이현세 만화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를 보았을 때, 그런 이름이 정말 있나 싶어서 찾아봤다. 그리고 빨간 꽃잎 위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하얀 밥풀무늬를 보고 적이 놀랐다. 풀꽃이름 중에는 누가 죽어서 그 자리에 난 것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많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제사상에 올릴 메를 짓다가 쌀알 두 톨을 떨어뜨렸다. 흙이 묻은 쌀알로 메를 지으면 불경스러울 것 같고, 그렇다고 쌀을 버리기에는 죄스러워하다 혀에 올려놓는 순간 시어머니가 이를 보고 제사에 올릴 메쌀을 먼저 입에 댔다고 호되게 꾸짖었다. 며느리는 뒷동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맸는데, 그 혀 위에 쌀알 두 톨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빼어문 혀와 밥풀이 연상되는 꽃을 보고 왜 가장 먼저 며느리를 떠올렸을까? 전통 사회에서 며느리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를 드러내는 흔히 보이는 보기로 '며느리밑씻개'나 '며느리배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며느리밑씻개'는 잎과 줄기에 잔가시가 있어 따끔따끔한 들풀인데, 별로 필요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우니 며느리 밑씻개로나 쓰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며느리배꼽'은 턱잎과 열매가 어우러진 모양이 배꼽처럼 생겼는데, 아들이나 딸 배꼽은 귀엽게 느껴지지만, 며느리 배꼽은 민망하고 하찮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담겼을 터이다. 풀이름 하나에도 옛 어른들의 삶과 얼이 배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사람 차별이 스민 이런 전통은 짚고 넘어가야 할 성싶다. / 글=임소영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분꽃 / 임소영

흔히 나오는 사극이나 '스캔들, 황진이' 등의 영화를 보면 옛날 여인들이 어떻게 꾸미고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분꽃'은 가루를 뜻하는 분(粉)과 꽃이 합친 말로, 까만 분꽃씨앗에 들어 있는 '가루'를 화장할 때 썼다고 붙은 이름이다. 분꽃씨 가루는 기미·주근깨·여드름을 치료하는 데 쓰기도 하였다. 마당가에 분꽃을 길러본 사람은 분꽃귀고리를 해 봤던 추억도 있으리라. 영어로는 '페루의 놀라움'(marvel of Peru)이나 '네 시'(four-o'clock) 꽃이라고도 이른다. 이 이름은 분꽃의 원산지가 열대 아메리카이고, 해질 때부터 아침까지 피는 꽃임을 알게 해 준다. 비록 좁은 발코니밖에 없더라도 화분에 씨앗을 뿌리면 아침에는 나팔꽃을 볼 수 있고, 나팔꽃이 지고 나면 다시 분꽃을 볼 수 있다. 식물의 연주를 누려보는 것은 어떠실지! 실은 분꽃이나 박꽃이 피면 저녁밥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들이 그 리듬에 맞추어 살았던 셈이다.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척박하던 시절에도 오히려 넉넉하게 화장도 하고 사랑을 꽃피우며 살았음을 까만 분꽃씨를 쪼개며 되새긴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한겨레]

[풀꽃이름] 은방울꽃 / 임소영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보고 싶은 풀꽃은 식물도감을 여러 권 찾아야 했으나, 지금은 컴퓨터에서 크게, 작게, 앞으로도, 옆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이 가져온 무척 행복한 성과다. 지나는 걸음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사진을 찍고 됨됨이와 추억을 기록해 둔다. 사진으로도 무척 많이 알려진 풀꽃에 '은방울꽃'이 있다. 이름 그대로 줄기에 조그만 방울이 매달려 있는데, 본디는 흰색이지만 고귀하게 느껴져서 '은'(銀)을 붙였다. 한자이름 '영란'(鈴蘭)도 방울이란 뜻이니까 모양에서 이름을 딴 전형적인 경우다. 영어이름은 '골짜기의 릴리'(lily of the valley)인데, 이 부분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프랑스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은 사실은 '은방울꽃'을 잘못 번역한 것이고,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에서는 해마다 은방울꽃 잔치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하는 성경 구절(아가2:1)도 의심이 간다. 영어성경의 '로즈 오브 샤론'(rose of Sharon) 또한 '무궁화'를 일컫는 영어이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샤론의 '장미'도 아닌 '수선화'로 번역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수선화와 백합으로 그린 게 사실은 무궁화의 일종이거나 은방울꽃일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어나 히브리어가 영어로 된 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굴절된 모습이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한겨레]

[풀꽃이름] 범꼬리 / 임소영

우리가 예부터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친근하게 느끼는 동물이 호랑이 곧 범 아닐까? 곶감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떡을 먹기도 하고, 동아줄을 타고 오르다 떨어져 버린 호랑이. 강아지풀이 강아지 꼬리를 닮아 붙은 이름이고 동네 길가에 흔하다면, '범꼬리'는 범처럼 1000미터 정도는 되는 높고 깊은 산 풀밭에서 자란다. 그 이름은 범 꼬리를 닮아 붙었고, 북부지역에서 만주지역에 많아 '만주범의 꼬리'라고도 한다. 약이름으로는 뿌리를 '권삼'(拳蔘)이라 하여 설사를 멎게 하거나 피를 멎게 하는 데 쓴다. 높은 산에서 자라 산꼭대기까지 간 사람들만이 군락지 장관을 맛볼 수 있는데, 지금이 한창이다. 하늘로 빳빳하게 치켜세운 두꺼운 꽃이삭에 호랑이 기상이 살아있는 듯하다. '호범꼬리'는 범꼬리보다 꽃이삭이 가늘고 긴데, 함경도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그런데, 이름이 '역전앞/새신랑' 구조다. '씨범꼬리'는 포기가 작고 꽃은 더욱 작다. 특히 백두산 분화구 바로 아래에 자라는데,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한다. 범 대신 범꼬리만 남은 땅이지만 그래도 구경할 것 많은 우리 산천이다. / 임소영 한성대 언어교육원 책임연구원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