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옷에 대하여 – 자화상을 보며' 김종해 (2022.01.01)

푸레택 2022. 1. 1. 16:07

■ 옷에 대하여 – 자화상을 보며 / 김종해

아침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
해 지기 전까지
입고 있었는데
으스름 저녁에 돌아와
일생의 옷을 벗으매,
내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
비로소 보인다
구름 한 벌, 바람 한 벌,
하느님 말씀 한 벌!

- 시집 《봄꿈을 꾸며》 (문학세계사) 중에서

한 번 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이 있기에 살아 있는 동안 찰나들이 빛난다. 죽음은 삶의 광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노경(老境)이다. 시인은 인생의 노경에 홀연 "일생의 옷 벗으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고 한다. 죽음이 별것인가? 모인 기(氣)가 마침내 흩어지는 게 죽음이다. 그때 우리 안의 구름, 바람, 물도 다시 제자리로, 제 모습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계급, 존비, 대소 따위가 아니다. 사는 동안 '활짝 열린 존재'로 얼마나 열심히 사는가가 중요하다 / 장석주 (시인)

● 죽은 용접공 형과 불꽃의 시.. 김종해 시인 아홉번째 시집 봄꿈을 꾸며

시력(詩歷) 47년째를 맞은 김종해(69) 시인이 시집 '봄꿈을 꾸며'(문학세계사)를 펴냈다. 2001년 '풀'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아홉 번째 시집이다.

삶을 향한 긍정의 시선이 돋보이는 시인의 시는 감정을 과장하거나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정갈하고 함축된 언어로 삶과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며 담백한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인은 특히 이번 시집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친구여, 길 위에서 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친구여, 봄날 꿈속에서 그들은 하나하나 모습을 보인다/ 김광협, 이문구, 조태일, 임영조, 손춘익, 박정만, 오규원, 김영태, 마종하, 신현정, 최하림……/ 살아 있는 자의 꿈,/ 한평생 살아온 길 위에서 뒤돌아보면/ 거기 보이는 모든 삶이 봄꿈이다 시집의 머리글 '길 위에서 이름을 부르며'에서 시인은 먼저 세상을 뜬 동료 문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을 향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용접공으로 살다 간 친형을 애도하는 시편도 눈에 띈다. 노는 날도 없이/ 한 평생 쎄가 빠지게 철공일 했던 생야/ 꼴랑 수당 몇 푼 더 받을끼라고/ (중략) 우아꼬 인자 우짜꼬/ 이리 훵하니 못 오는 길 혼자 가뿌렸으니/ 아부지 어무이가 있는 나라" ('우야꼬 인자 우짜꼬' 일부)

지난해와 2004년에 각각 세상을 뜬 신현정 시인과 김춘수 시인을 그리며 쓴 시편도 보인다. '산 날이 살 날보다 많은' 시인은 교우가 깊었던 문인들과 가족의 죽음으로 한동안 상심에 빠졌던 듯하다. 봄이 왔어도 꽃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상심은 깊고도 컸다. 망자를 생각하면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봄날이 왔으나 꽃을 볼 수 없었던 것/ 내가 망자와 같이 있었거나/ 망자와 일체가 되어 지냈음이라 ('망자를 그리며' 일부)

시인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이렇게 시편에 담았다. 세상에 보이는 것 모두,/ 움직이는 것 모두가 그대의 것이 아닌 날// (중략) 오오, 그대여 기억하라/ 몸을 태우고 한 줄기 연기만 남긴 사람들을 생각하라('사라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일부)

하지만 시인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삶을 관조한다. 아침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 해 지기 전까지/ 입고 있었는데/ 으스름 저녁에 돌아와/ 일생의 옷을 벗으매,/ 내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 비로소 보인다 ('옷에 대하여-자화상을 보며' 일부)

날개를 가진 것은 반드시 추락한다/ 낙하하는 모든 것의 몸체에는 날개가 있다/ 일생 동안 날아오르는 꿈을 꿀 동안/ 추락하는 내 몸체엔 날개가 있었다 ('날개를 가진 적이 있다' 일부)

만약에 말이지요, 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중략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봄꿈을 꾸며' 일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젊음의 노도질풍기와 중년의 신산함을 지나 고희를 맞는 시인은 이제 평정과 평온의 심경에 이른다. 세상 이치에 대한 화해와 거기서 유래한 인간 긍정과 세계 긍정이 성취한 정신의 경지이다 라면서 이 시집은 은은하고 탈속한 삶에 대한 송가가 되어주고 있다고 밝혔다.

글=라동철 기자 (국민일보 201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