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중에서
나희덕, 「배추의 마음」- 배추의 풀물과 사람의 옷소매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시간만 나면 이런저런 공동체들을 찾아다녔다. 생태적 지향을 가진 공동체도 있고, 이념적 성격이 강한 공동체도 있었으며, 종교적 공동체도 있었다. 도시의 일상이 나를 무디게 하고 옥죄어 올 때마다 산이나 들판 구석에 숨어 있는 그곳을 찾아가 지친 영혼을 내려놓곤 했다.
「배추의 마음」은 20대 중반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이라는 수도원에 머물 때의 경험을 담은 시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일정한 노동만 하면 그냥 먹고 잘 수 있었다. 마침 배추밭에 일손이 필요하다기에 냉해를 막기 위해 지푸라기로 배추포기를 묶어주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살다가 늦가을 수도원의 배추밭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식구 이상으로 친근하고 강한 정신적 유대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추의 마음」은 밭 구석에서 묵묵히 일을 하며 들었던 사람들의 대화를 나중에 시로 쓴 것이다. 사람들은 몰랐으리라, 자신들 곁에 한 젊은 시인이 마음으로 그 말들을 받아적고 있었다는 것을. 이 시에 인용문으로 처리되고 있는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등은 실제로 내가 들었던 말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 순하고 평화로운 말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노동을 마치고 저녁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이 시를 쓰면서도 나의 주관적 감상보다는 그들의 온기가 되살아나도록 애를 썼다.
그곳을 떠나오던 날, 나는 밭에서 함께 일하던 한 동료의 손에 이 시를 필사해 쥐어주었다. 이 시는 다름 아닌 당신의 것이라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심지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배추밭에서 사람들이 도란거리던 말소리와 내 옷소매에 들었던 풀물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중에 두 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내면서 이 시가 조금 단순하고 계몽적인 느낌이 들어 제외시킬까 하다가 넣은 것도, 그 풀물의 아름다움이 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시가 교과서에 실리고 나서 다소 번거로운 일들을 겪기도 했다. 학기 초만 되면 숙제를 하는 중학교 학생들이 메일을 보내와 질문을 해댔고, 어떤 교사는 이 시가 과학적 사실이나 영농적 상식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이라는 대목을 자기 방식으로 유추해 내가 배추의 파종 시기를 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표현이 없을 뿐더러, 나는 여러 해 동안 장마가 끝날 무렵이면 배추 모종을 심어 직접 키워보기도 했다. 그리고 농사의 적(敵)인 배추벌레를 이렇게 걱정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 역시 직업적인 농사꾼이 화자가 아닌 바에야 배추와 배추벌레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어찌하랴, 이게 모두 시가 교과서에 등장하는 순간 겪어야 할 곤혹인 것을.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는 순간 또 하나 잃어버린 게 있다면, 그 배추밭의 고즈넉한 평화와 고요가 어쩐지 씩씩한 동요 톤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 배추를 두고 연상하는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뒤이어, ‘한 편의 시란 그렇게 다르게 읽혀질 수 있는 것이지’ 하는 긍정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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