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첫번째가 나를 / 김혜수
모든 첫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에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번째 기적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 첫 경험과 첫 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 시집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감상]
첫 만남, 첫 인상, 첫 키스, 첫 경험, 첫 사랑... 우리 생이란 첫 걸음을 떼면서부터 모든 ‘첫’과 마주치며 떨림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을 갖는다. 이름도 닮은 김혜순 시인의 ‘첫’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이라 했다. 그러면서 그 ‘첫’은 ‘아마도 당신을 만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배우 김혜수가 아닌 김혜수 시인은 ‘모든 첫번째가 나를 끌고 다’닌다고 한다.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들은 ‘첫번째 노래’에 필이 꽂혀 ‘태엽에 감긴 자동인형처럼’ 종일 첫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첫눈은 누군가의 의해 밟혀지고, 첫날밤은 또 누군가에 의해 찢기어지는 매정한 것. 첫 눈물과 첫 상처가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는다. ‘모든, 첫번째의, 인질’이고, ‘모든, 첫 기척의, 볼모’인 ‘나는’ 언제나 처음 탄 밤기차 안에서 과자봉지를 부스럭대듯, 때로는 첫 화투 패를 받아들고 쪼듯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그래서 여자는 늘 남자의 마지막 사랑을 꿈꾸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늘 첫 사랑을 동경한다는 말도 낡은 언사임을 안다.
우리에게 다가왔던 그 숱한 ‘첫’들. 왜 사람들은 '첫'이란 형용어구 뒤에는 늘 '사랑'이나 '경험'을 떠올리는지. 또 그 경험은 '그것'으로만 요약되는지. 필름이 돌아가며 지지직거리고 끊긴 것들, 혹은 생생한 것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첫’들. 떨림의 진동이 약화되었겠으나 또 다가올 얼마간의 ‘첫’들. 세상에 나올 때 크게 울었던 첫 울음처럼 나에겐 두려움이었으나 그대들에겐 탄생의 신비이고 기적인 그 울음처럼 언젠가 맞이할 첫 죽음도 그렇게 설렘이기를. 그 누군가에겐 환호이기를. (글=권순진 시인)
/ 2021.12.3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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