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 이동순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
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
파헤쳐 놓은 수도공사도 끝내지 못했는데
태어나리라던 아기예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여지껏 나무에 대룽대룽 매달려
애잔한 잎들은 팔랑이는데
못다 쓴 원고뭉치는 그대로 밀려 있는데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새들도 있는데
불현듯 불현듯 새해는 왔는가
기다리던 첫눈도 나리지 않고
적적한 마당귀를 덮고 있는 김장독 이엉 사이로
시궁쥐만 분주히 쏘다니는데
새해는 왔는가
헛꿈을 잔뜩 안고 돌아와 저 혼자 설레이는
놈팡이처럼 새해는 왔는가 와서 무얼 하려는가
모듬판에서 돌아오는 밤
이미 자정을 넘겨 볼에 스미는 찬 기운
텅 빈 호주머니와 마음 속으로
아무거나 새것이라면 마구 채워야 하는 걸까
다 와서 속절없이 가 버리는 것이
새해일까 나라는 깨어지고 깨진 틈서리는
서로 붙을 생각조차 품지 않는데
보리싹 파릇파릇 움 틔우는 저 들판이
후루룩 겨울참새를 허공에 뿌리는 그 속마음은 무엇일까
- 이동순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 소소한 행복 / 남정림
뒤돌아보니
행복은 내 편이었더라
내가 행복의 편이 아니었지
벽돌 담장의 발등에 핀
풀꽃의 미소도
푸른 하늘의 구름이 그린
응원의 글귀도
누리지 못하고
멀고 휘황찬란한 것만 쫓아다녔지
뒤돌아보니
행복은 내 편이었더라
일상의 그늘 속에 숨어 있었고
내 발밑에서 숨을 쉬고 있었지!
오늘은
눈 뜬 소소한 행복부터
지갑 속에 빼곡히 넣어두리라
내가 행복의 편에 서 보리라
■ 들꽃이 전하는 이야기 / 김민수
들꽃 하나 풀 한 포기도
뿌리내릴 땅을 찾아
자기만의 생을 영위하고
생명에 대한 애착은
하늘도 못 이길 만큼
강하고 끈질기다.
새벽에 내리는 찬이슬로 목축이며
간신히 버티는 삶이어도
안으로 힘을 비축하여
갑자기 천재지변이 들이닥치고
나그네의 발에 밟힌다 해도
그 푸른빛은 변함이 없고
들판을 지키는 향기는
장대 소나기에도 녹지 않는다.
가꿔주는 손길이나
지켜보는 눈길이 없어도
햇살 한 줌에 위로 받고
바람결에 땀을 식히며
계절 따라 인생을 배우고
인생 속에 계절을 담아
뿌리가 깊은 들녘의 주인으로
묵묵히 커간다.
말이 없는 들풀 꽃은
겨울이 오는 의미와
봄이 오는 희망을
하늘에서 배워
땅에게 가르치며
필 때와 질 때를 잊지 않고
더 간절하게
더 당당하게
사랑의 언어로 세상을 덮는다.
화려한 꽃잎도
천 리를 가는 향기도
견고한 뿌리에서 오는 힘이며
흔들림 없는 의지로 피워 올리는
숭고한 생명의 증거이니
저들보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며
저들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욕심으로 높아진 세상을 벗어나
땅에 납작 엎드리니
참으로 편하다고 들풀이 전한다
/ 2021.12.3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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