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새해를 향하여' 임영조 (2021.12.31)

푸레택 2021. 12. 31. 22:01

■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 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 시집 『귀로 웃는 집』 (창비, 1997)

[감상]

지금껏 매년 정월 초하루면 받아들었던 새해 365일은 그때마다 ‘눈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이고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이었다. 그 시험지에 무엇을 어떻게 적었는지 모른 채로 매번 더 써야할 무엇이 남은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서둘러 시험지는 거두어졌고 세모의 어수선함에 떠밀리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다시 새해였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 1분의 루즈타임도 허용되지 않은 채 가차 없이 시험지가 회수된 그 자리에는 새로운 네 자리 수 2015란 낯선 백지 하나가 놓여있다.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기까지 한 그 백지에다 ‘이번만은 기필코…’ '올해 이것만은...'이라며 저마다 모종의 각오를 다짐하지만 어차피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자신의 나이가 무겁게 느껴질 때면 채점표에 유난히 신경 쓰이고 초조함은 더해만 간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느끼는 시속은 사람마다 연식마다 다를 것이다. 사람은 나이만큼의 시속으로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버나드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끝장날 줄 알았지’란 말이 더욱 폐부를 찌른다.

도대체 뭘 하다가 벌써 이 나이가 된 건지 생각해 보면 허무하고 기가 막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다시 주어진 백지 하나를 받아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삼백예순 다섯 날 새털같이 많은 2015년의 하루하루를 힘껏 그리고 새롭게 살아낼 일이다.

당분간은 푼돈을 찾기 위해 쓰는 예금청구서나 동사무소에서의 민원서류에서 2014란 숫자가 서성될지도 모르겠다. 미련때문은 아니고 관성이 돌연 멈춰지지 않겠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까작까작 안부를 물어오는 까치에 화답하며 반듯하게 새날을 맞아야겠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에 적힌 내용 그대로 2015 근하신년! 해피 뉴 이어! (글=권순진 시인)

[원문보기] 詩하늘 통신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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