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송년 엽서' 이해인 (2021.12.31)

■ 송년 엽서/ 이해인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 번 스쳐가듯

빨리 왔던 시간들은
빨리도 떠나가지요?

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어서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어요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눈길은 고요하게
마음은 뜨겁게
아름다운 삶을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 보면

첫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 항상
우리 길을 밝혀주겠지요?

- 시집『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열림원, 2014)

[감상]

‘세월 참 빠르다’란 말을 유독 많이 듣는 이즈음이다. 나이든 사람일수록 그 말을 자주 한다. 정말로 나이와 시간의 속도는 비례할까. 객관적인 시간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지지만 시간의 속도를 감각하는 것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흘러가는 강물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다 해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유속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강물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강둑을 달리던 젊은 시절에는 강물이 그만큼 빨리 흐르는지 몰랐다. 그러나 갈수록 걸음은 더디고 강물의 걸음은 재발라져서 유속도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기억에 남을 만한 새로운 경험이 줄기 때문에 시간의 프레임도 뭉텅뭉텅 잘려나간다. 뇌에서의 정보처리속도가 빠른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좀 더 촘촘히 볼 수 있었건만 나이를 먹게 되면 그 능력도 점차 감소한다. 평소 익숙한 상황이나 장면들은 기억에 저장되지 않고 대충 건너뛴다. 머리에 저장되는 정보량이 적다보니 나무를 소상히 보지 못하고 숲의 원경만 본다. 따라서 시간도 빠르게 지나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이든 처음의 경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10대 때는 모든 경험들이 대체로 첫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롭게 느껴지고 기억도 오래 간다. 나이가 들면 반대로 모든 것이 익숙해지면서 타성에 젖는다. 또한 설렘의 기회도 적어진다. 장래에 대한 설렘과 명백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 시간이 기다려지면서 현재의 불만족한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내 생애 가장 시간이 더뎠던 게 군복무 시절 제대 명령을 받고 실제 전역 날까지 한 달 동안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빨리 왔던 시간들은’ 대체로 떠날 때도 빨랐다. 돌아보면 모든 시간들이 짤막했다. 논어에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 전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숙연하고 장엄하게 저문다. 매 순간 알차게 시간을 꽉꽉 채워가며 살아야 마땅한데 그러지 못했다. 법정스님은 “삶은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선물이요, 아름다움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순간순간의 설렘으로 최대치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 늙어가는 마당에 당연히 쉽진 않겠으나 그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방법일 뿐 아니라 세월이 마디게 흐르도록 하는 비방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른 다음 돌아보면 기억할 게 많고 추억들이 풍성할수록 삶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어서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다.’ 지난 시간은 사실 소용없는 과거일 뿐이다.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장차에 대한 묵직한 설렘과 기대를 가지면서 현재를 신선하고 성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내 소중한 세상이리라. 강물은 산 그림자를 싣고 멀어져가고 별을 몰고 돌아온 어둠은 우리 둘레에 자욱한데 우리의 꿈들은 소중했던가. 밝아올 여명을 또 기다렸던가.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보면’ ‘첫 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 항상 우리 길을 밝혀’ 주리라. (글=권순진 시인)

/ 2021.12.31(금) 옮겨 적음

[원문보기] 詩하늘 통신 (daum.net)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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