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그리운 날 / 강초선
마음 지독히 흐린 날
누군가에게 받고 싶은
한 다발의 꽃처럼
목적 없이 떠난
시골 간이역에 내리면
손 흔들어 기다려 줄
한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 우체통같이
내 그리운 마음
언제나 담을 수 있는
흙내음 풀냄새가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참 좋겠다
하늘 지독히 젖는 날
출렁이는 와인처럼
투명한 소주처럼 취하고 싶은
오솔길을 들면 기다린 듯
마중하는 패랭이꽃 같은
제비꽃 같은 작은 미소를 가진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 빈 의자처럼
내 영혼의 허기 언제나 쉴 수 있는
등대 같은 섬 같은 가슴이 넉넉한 사람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참 좋겠다
- 시집 《구멍》 (2005, 맑음)
[감상]
사람이 외롭고 누군가를 그리워 해도 아무에게나 무조건 달려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캐스트 어웨이》 영화에서와 같이 절대적 외로움을 이기려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월슨’이란 이름까지 붙여 처절한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경우는 그 어떤 대상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대개 나름의 조건이 붙는 선택적 외로움이라 하겠다. 아무나에게 사랑이 허락될 수 없듯 그리움도 그렇다.
이 시에서 언급된 그리움의 기대치는 얼른 별 것 아닌 것 같은데도 실은 녹녹치않은 수준의 사람이다. 한적한 시골 간이역에서 손 흔들어 기다려줄 사람, 빵빵한 우체통같이 상대의 마음과 사연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사람, 흙내음 풀냄새가 폴폴 풍기는 아름다운 사람, 와인잔을 쨍그랑 마주치며 소주처럼 투명하게 취할 수 있는 사람, 오솔길 제비꽃같은 작은 미소를 겸손하게 날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그의 가슴팍에 언제나 얼굴을 묻고 영혼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지만, 이쯤되면 그리움의 조건이라기보다 구애의 조건이라 할 만하다. ‘등대 같은 섬 같은 가슴이 넉넉한’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면 언제든지 무조건 달려갈 특급 사랑의 태세이며, 이미 서로 바라만 보아도 좋을 사람이다.
그저 점심은 먹었냐는 평범한 전화 한 통에 오붓하게 정이 작동되는 소박한 그리움이 아니다. 마음 꿀꿀하고 무거울 때 사랑이나 우정의 이름이 아니라도 말없이 다가와 작은 미소 선한 눈빛 하나 날려만 주어도 좋을 사람, 잘 지내냐는 간단한 안부와 함께 손을 잡아줄 사람, 목련이 활짝 피었다며 기약 없는 약속이지만 언제 술 한 잔 하자는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 이 찬란한 봄날이 가기 전에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다. (글=권순진 시인)
/ 2021.12.2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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