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사랑/ 오탁번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羽化되어 하늘로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빗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 시집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1999)
[감상]
아름다운 옛 추억을 회상하는 일은 실제로 정신 건강에 매우 이롭다고 한다. 가끔 그리운 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것이 기분을 좋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여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는 외국의 한 연구 결과가 있었다. 당연히 그때의 추억이란 ‘그 옛날의 사랑’이 잔잔히 흐르는 즐거운 기억이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게 해주는 마음의 고향밭일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 추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도 당장 오늘 아침 며느리가 차려준 밥상은 까맣게 지워버리지만 70년 전 고향 실개천에서 깨벗고 물장구치며 함께 놀았던 동네머스마 배꼽의 사마귀는 또렷이 기억한다.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고스란한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그리움. 그즈음 내 어머니도 가을이면 연례행사로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 문짝을 떼어 낡고 바랜 창호지를 북북 찢어내고 문살을 말끔히 닦은 다음 묽게 쑨 풀로 새 한지를 발라 그늘에 세워 말렸다. 풀기가 거의 말라가면 손잡이 부근엔 책갈피에 끼워 말려 두었던 꽃잎과 나뭇잎사귀 몇 장을 얹어 오려낸 한지조각을 덧대어 발랐다. 자연의 소리와 향기와 풍경을 그대로 방안에 들였으니 어린 마음에도 그 은은한 멋이 아름다웠고 썩 좋았다.
어디 그뿐이랴. 이불호청을 뜯어 빨아 빳빳하게 풀 먹인 후 다듬잇돌 위에서 토닥토닥 다듬이질 하는 소리가 가을햇살과 함께 퍼지면 옥양목 같은 ‘그 옛날의 사랑’은 그 자리에 그냥 멈춰선 그리움으로 지금까지 생생하고 싱싱하게 남아있다. 이불호청을 펴서 어머니와 맞잡고 팽팽히 잡아당기는 일을 가끔 거들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마냥 뿌듯했다. 그리고 턱을 괴고서 어머니의 다듬이질 박자를 음악삼아 즐겼다. '신가다 아지매'로 불렸던 숙모와 함께 현란한 리듬을 타고 두드리는 다듬이질 협연은 압권이었다. 넌버벌 퍼포먼스'난타'를 처음 볼 때도 단박에 그 소리, 그 옛날의 사랑을 떠올렸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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