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빈집을 지키는 홍시' 박경자

푸레택 2021. 12. 28. 09:40

■ 빈집을 지키는 홍시 / 박경자

바람도 문고리 흔들다 돌아간
빈집엔 하늘만 파랗게 내려와 출렁이고
한 뼘도 안 되는 햇살에 보리 싹 월동준비 하는데
퇴직한 잎들 정년에 취해 흩어지네

긴 막대기로 머리 얻어맞고 굴러 떨어지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는 하려나
뜨끈한 가마솥에 구수한 보리쌀 눌어붙으면
등겨 풀어 두어 마리 워리 밥 훌쩍이던 그 시절 그리워
올해도 푸르고 떫은 여름 서리에 녹여
높은 가지에 걸어놓고 기다린다네

그리울수록 영글게 달아오르는 속내
어인일인지 뛰쳐 내려
붉게 타는 속 펼쳐보이리

- 《너른고을문학》 21집 (한국작가회의경기광주지부, 2016)

[감상]

감은 추위에 약한 대표적인 동양의 온대성 과수로 우리나라의 경우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재배가 곤란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초등학교 국어 책에는 늘 남쪽에 계신 외할머니가 따준 홍시가 나온다. 남녘의 감 주산지로는 영동, 상주에서부터 쭉 내려오면 청도, 함안, 하동, 김해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청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 없는 반시로 유명하다. 얼마 전 이곳의 감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겨울의 초입인데도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홍시를 드문드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난화의 영향으로 감나무의 북방한계선이 계속 북상하여 설악산 턱밑까지 올라왔다. 깊어가는 가을풍경으로는 오색 물결로 아름답게 변하는 단풍을 제일로 꼽지만 벼가 익은 누른 벌판과 주렁주렁 주홍감이 달려있는 경관도 그에 못지않다. 차를 달리다 보면 감나무 가지 위에서 감이 익어가는 풍경은 아름답고도 정겹다. 감나무는 사람과의 정분이 남달라 감나무가 있으면 어디나 고향 같다. 감나무에는 시간을 거슬러 어릴 적 기억을 환하게 밝혀주는 화수분 같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오덕 선생은 벼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 감은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야 열린다고 했다.

나훈아의 「홍시」란 노래가 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노계 박인로의 에는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소반에 받쳐 내 놓은 빨간 감을 대접받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정이 가슴을 찌른다.

가을이 다 가도록 빈 집을 지키고 있는 저 홍시. 보통 집에서는 단감을 심지 않고 떫은 감을 심는다. 단감은 제철에 바로 먹어야 하지만 떫은 감은 그렇지 않다. 낙엽은 저렇듯 지난 추억들을 아무렇게나 흩날리는데 홀로 허공을 꼭 움켜쥐고 있다. ‘퇴직한 잎들 정년에 취’한 모습이 저러하고 긴 기다림으로 상기된 그리움의 절개가 저 모습이든가. 바람이 들이닥쳐 문고리를 흔들 때면 홍시는 악착에 더욱 힘을 쥔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듯이 그럴수록 얼굴이 붉어진다. 여전히 채워야 할 단맛이 필요했던 것인지, 추락의 물컹거리는 몰골이 두려워서인지 ‘떫은 여름’ 잘 견디고도 ‘서리’가 내릴 때까지 요지부동의 자세다.

‘한 뼘도 안 되는 햇살에’ 나뭇가지와의 별리가 저토록 안타까울까. 자신마저 훌훌 털어버리고 뉴턴의 법칙에 순응한다면 빈집은 누가 지킬 것인가. 그러나 모든 이들이 다 외면하고 떠나버린 후에도 나목을 부여잡고 마지막 안간힘에 지쳐있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허공을 붙잡고 나뭇가지의 손을 꼭 쥔 홍시의 저 모습도 언젠가는 저 홀로 쪼그라들거나 툭툭 터져 문드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리움의 긴팔이 뻗히지 않더라도 설한풍 속에서 발간 얼굴을 수줍게 내민 모습을 상상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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