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삼천리 문학》 2호 (1938)
[감상]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백석 시인을 모를 리 없겠지만,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시 말고는 도통 시를 들여다볼 일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한 여성 시인으로부터 자기 남편이 백석을 모르고 기형도와 이성복이란 시인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무식쟁이라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백석은 해방 후 고향마을 가까운 북녘 땅에 그냥 주저앉아 살았다고 해서 월북문인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백O, 혹은 X석 등의 표기로 이름이 감춰진 시인이었다. 그러다가 88서울 올림픽에 즈음해 해금되어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아 문인들에겐 소월을 능가하고 미당에 뒤지지 않은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 시는 몸이 아파 찾은 병원에서 삼국지 관운장을 닮은 의사와의 진맥 중 오가는 대화와 그의 손길을 통해 혈육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담한 어조로 진하게 그려져 있다. 사람이 객지에서 앓아누워있으면 보고 싶고 그리운 것도 많아지는 법인데, 그 중에도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향수는 거의 자연 현상에 가깝다.
지금은 그 정서가 전에 비해 많이 옅어졌지만 객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난다는 건 고향의 일부를 만난 것이나 진배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덕에 어려운 일을 피해 가기도하고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으며,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끌어주고 밀어주기도 했었다. 지금도 특정 지역 특정 학교의 지연 학연으로 형성된 공직 인맥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며,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지역간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그 시절 객지에서 만나는 고향 사람에게 느끼는 정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을 짚다가 문득 '고향이 어데냐'고 묻는 건 그 말투와 분위기가 왠지 낯설지 않다는 뜻이다.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핀 고향땅이 먼저 눈앞에 어른거려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그 말이 이끄는 고향길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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