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모역 / 조명선
숙이고모 돈 벌러 눈물로 간다, 간다
코끝에 걸린 달빛 따라 금호강 기슭을 돌아
능금꽃
파르르 떨며
발길 적시는 고모령 넘어
그렁그렁 매달린 사연 쓰윽쓱 문지르며
의심스런 눈길에 밀봉당한 간이역
배웅도
마중도 없이
꽃 멍으로 내린다
한눈 팔 사이 없이 살 세게 달린 철길
동대구 출발하여 고모역 통과합니다
미끈한
안내방송이
눈시울 더듬는다
- 시조집 『하얀 몸살』 (동학사,2010)
[감상]
고모역의 ‘고모’는 현인이 부른 국민애창곡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인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낱말이다. 고모령은 대구의 그저 그런 평범한 고갯길에 불과한 지명이다. ‘고모’는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의 조합으로써 여러 이야기로 그 유래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숙이고모'의 경우처럼 아버지 누이인 고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새의 비상하는 모습을 춤추는 것에 비유하여 고무(高舞)라 했는데 그 발음이 변화되었다는 전혀 다른 주장까지 있다. 시인은 그런 여러 설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상상력으로 고모의 공간에 사연을 부려놓았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그만큼 이 고모령과 고모역은 특정 어머니의 고달픈 삶과 애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보편적 그리움과 이별의 애잔함이 서린 곳이다. 고모든 이모든 누이든 이웃 아주머니 사연이든 동란의 피난길에서, 돈 벌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길에서, 감옥에 갇힌 자식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젓가락 장단에 신세타령으로 녹아들어 위로를 주었던 추억의 고유명사이다. 고모역사 앞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박해수 시인의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라고 시작되는 간이역 시비도 있다.
1925년 영업이 개시되었으나 2006년 역무원 없는 간이역으로 격하되더니 지금은 이름만 남았다. 한동안 외부의 접근을 막는 쇠망을 씌워두기도 했고 공매처분이 여의치 않자 임시소방서 등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몇 년전부터 지역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에 가요박물관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진 못한 것 같다. 2003년 시에서 9억 원을 들여 설치해 고작 2년 남짓 소소하게 교통편의시설로 기능하다가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조물인 고모역 육교는 애물단지처럼 부담스럽기만 하다.
덩그러니 까치밥처럼 남은 노래비 말고는 고모령과 고모역을 추억할 수 있는 기재는 별로 없다. 문인수의 시 <고모역의 낮달>에서 ‘떠난 세월만 한없이 푸른 허공이고 돌아오는 이 없는 도시 속의 오지’로 오래도록 남아있거나, 박해수의 <고모역>에서 ‘어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옛 달처럼 덩그러니 걸려’있거나, 이렇게 간간이 고모역을 추모하는 시인의 시에서나 ‘눈시울 더듬’을 도리 밖에는 뾰족한 길이 뵈지 않는다. 아마 지금은 '동대구 출발하여 고모역 통과합니다'란 안내멘트조차 들을 수 없지 싶다. 그러니 눈시울 더듬을 일이란 도무지 없겠다.
2년 전 폐선된 대구선 아양철길변공원에 아무리 대구를 대표하는 노래가 없기로서니 먹어주지도 않는 패티김의 '능금꽃 피는 고향’ 노래비를 세운 것도 그렇거니와, 얼마 전에는 생뚱맞게 대구시 달성군 옥포에 별 연고도 없는 송해 선생을 끌어들여 '송해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발상 역시 내보기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차라리 이동순 시인의 '가요반세기'와 접목하여 대중가요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대중가요 변천사를 잘 정리하고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 전문 박물관이라도 하나 제대로 선다면 또 몰라도.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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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역 / 박해수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뒤돌아보면 옛 역은 스러지고
시레기 줄에 얽혀 살던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
아 바스라지고 부서진 옛 기억들
부엉새 소리만 녹슨다
논두렁 사라진
달빛 화물열차는 몸 무거워
달빛까지 함께 싣고
쉬어 가던 역이다
고모역에 가면
어머니의 손재봉틀처럼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화물열차만
꽁지 빠진 새처럼
검은물새떼처럼
허기지게 날아가는
그 옛날 고모역 선로 위에서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는
슬픔처럼 비껴 서 있는
그 옛날 고모역에서
● 고모역의 낮달 / 문인수
고모顧母, 고모동이라는 데가 대구의 변두리에 있다
늙으신 어머니를 돌아본다는 사연이 젖어 있다 생전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서는, 돌아서 가다 또 돌아보는,
이별 장면을 담은 흘러간 유행가
‘비 내리는 고모령’의 현장이다 야트막한 고갯길이
비가 내리면 아직도 실제로 비에 젖는다 수십 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고모동 일대는
훼손되지 않은 산과 들, 금호강 강굽이가
대구의 동쪽 관문을, 인터불고호텔 같은 건물들을 그럴듯하게
꾸며주는 유일한 배경이다 정작
문짝 하나 새로 달 수 없는 고모동엔 무엇보다
초라한 고모역이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 없는 도시 속의 오지다 바쁘게 살아온
그대 변두리의 쓸쓸한 취락, 허공의 폐역, 어머니를 돌아보라
헌 집에 홀로 사시다 저 낮달이 된 지 오래다
ㅡ시집 『배꼽』, 창작과 비평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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