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부 /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2010)
[감상]
얼마 전 북경 여행 중에 뜻밖의 전화 두 통을 받았다. 한 사람은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을까 말까하는 친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집안 행사 때나 겨우 만나는 6촌 형님이었다. 그들은 대뜸 “별 일 없냐?”고 물었다. 별일은 없는데 잠시 중국에 와있노라고 했더니 “그래서였나? 며칠 글이 안보여서”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의 매일 페이스 북과 인터넷카페 몇 곳에 올리는 글들이 며칠 안 올라와 혹시 아프거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안부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페이스북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어느 카페에서 흔적 없이 내 글을 봐왔던 것인데, 이런 연유로도 사람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의 대부분은 우연한 만남의 자리에서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전화 통화를 끝낼 때 그냥 끊기가 무엇해서 습관적으로 뱉는 인사치레다.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면 적어도 적대감은 없다는 것이고 언제든 다시 만나면 정말로 술이든 밥이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호감은 갖고 있다는 의미겠으나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까 빈말인 셈인데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연락할 의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잔’이 성사되기 힘든 이유는 내 삶의 우선순위에 당신이 앞쪽에 없다는 거고 한잔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은 없다는 함의도 있다.
당신을 만난 게 반갑거나 반가운 척을 해도 좋을 사이지만, 그렇다고 당신과 같이 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뚜렷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과는 조금 아는 관계일지라도 많이 친한 사이인 것처럼 친밀함을 드러내는 인사이니 나쁠 게 없으므로 서로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진짜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이 있고 그로인해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술과 밥만이 아니다. 지나가는 인사로 ‘언제 작품 한번 같이 해요’라는 감독의 말을 찰떡같이 믿고 ‘그날’만 학수고대하다가 애간장이 녹아내린 신인 여배우도 있고, ‘열심히 한번 해보세요.’라는 평범한 덕담을 공천약속으로 착각한 신인 정치인도 보았다.
‘언제 한번’이라는 막연한 시간의 등짝에 업어치기당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일상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나 자신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이래저래 사람 도리를 제대로 못하며 살아간다. ‘연락 한번 할께’라는 막연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서운한 분도 있었고, ‘한번 알아보겠노라’고 해 놓고서는 알아본 것 없이 연락조차 않은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나의 지리멸렬함과 게으름, 무뚝뚝함과 속절없음 탓이겠다. 그리고 관계는 늘어나는데 기억력은 자꾸 떨어진다.
중요한 약속은 지켜야 하고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세상에 없다. 흔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형편없는 놈이라고 공사다망한 정치인들에게는 쉽게 욕을 해대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최대한 관대했던 건 아닌지 돌아본다.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모두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 약속이 아니더라도 안부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안부는 우리 삶에서 가장 긴요한 것들이 아주 단순하고 원시적인 토대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뜨겁게 일깨운다.
우리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살아 있음을 가장 뜨겁게 증언하는 것이리라. 사랑이란 것도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던가. 나 자신 지금껏 안부를 묻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더 늙고 피폐해지기 전에 한잔할 사람과는 한잔하고 밥을 먹을 사람과는 꼭 밥을 한 끼 먹어야겠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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