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가정' 박목월 (2021.12.26)

푸레택 2021. 12. 26. 09:47

■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시집 『청담 晴曇』 (一潮閣, 1964)

[감상]

과거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되었던 이 시에서 '내 신발'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시험에서 단골로 출제되었다. 신발이란 제재는 현대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대개는 살아온 인생과 고난의 과정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연민한 삶의 길’이 신발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요즘은 이런 용어를 거의 듣지 못하는데 신발의 ‘문수’는 신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1문은 약 2.4cm로 특히 설 무렵의 신발가게에서는 분답하게 오갔던 흥정의 수치였다.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나온 엄마들은 발에 딱 맞는 문수보다는 신발의 앞부분을 쿡 눌러보고 늘 한 치수 여유가 있는 신발을 고르곤 했다. 아이를 대동 못한 어머니들은 뼘으로 잰 길이를 맞추어보거나 미리 잰 끈으로 신발에다 대어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눌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의 가슴에도 그들을 향한 사랑만큼은 밝고 따뜻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눈과 얼음의 길’이었으며 가팔랐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당도한 문간에서 올망졸망한 신발 아홉 켤레를 보며 울컥 자녀들과 가정을 굳게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십구문반’이나 되는 비현실적인 큰 신발임에도 어설프고 후줄근한 자신을 연민하는데 식솔들에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숨어서 미소하며 희망의 나래를 퍼덕인다.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이고 그 시대 아버지의 권위였던 것이다. 5~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개 그때의 남루와 가족 사랑을 떠올리며 유년의 뜰에 가닿을 것이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가난할수록 가정에 대한 애틋한 정이 더 물씬해지는 법이다.

내 유년기도 그러했지만 속사정은 조금 달랐다. 설을 하루 앞둔 어느 해,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고 몰래 손바닥 뼘 벌려 잰 문수로 신발을 사들고 오신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엄마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신발의 꿈을 재단하고 있다. 내 기억이 허술하지 않다면 한 번도 내 손을 꼭 잡아준 적이 없던 아버지께서 생애 처음 신게 될 끈 달린 운동화의 첫 끈을 묶어주셨던 그 설날은 생생히 기억한다. 내 아버지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오신 것은 매 한가지겠으나 내게 ‘미소하는’ 얼굴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당신 스스로 ‘어설픈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리라. 아버지와 볼을 부빈 추억도, 까칠한 턱수염의 감촉도, 단 한번 ‘내 강아지’라 불려본 적도 없었으므로. 다만 신발 끈을 묶어준 그 기억만으로 지금껏 내 아버지의 가정을 근근이 긍정하는 것이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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