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증 / 박복조
노인은 약국 박카스 손님이었다
남루였지만 정장 차림에 눈이 맑고 깊었다
서울 사는 아들이 삼성 이사라고,
이틀에 한번은 약국에 와 아주 목마른 듯 마셨다
그때마다 아들 이야기는 꼭 후렴
요즘 너무 바빠서 못 온다며 내려보는 구두 끝이 단정했다
살 에이는 추운 어느 날 전철 계단에서
고개 숙이며 손만 내민 검은 어둠,
눈에 익은 정장, 그 노인
튼 손, 다리도 절뚝이며 박카스를 먹는 입술이 허옇다
갈증이 심한 사람처럼 단숨에 마셨다
저 속에 불길이 있나 보다
뜨겁고 비릿한 넌출 같은 것이 아들 향해 기어오르는,
그러나 돈은 언제나 놓고 갔다
차츰 자식 이야기가 뜸해지고 겉옷 속내의가 새까맣다
땟국이 흐르고 냄새나는 정장은 어디서 잤을까
어느 날 윗옷도 없어지고 거지 모습이 완연한 노인이 비칠거린다
준비한 내의, 털옷을 주니 순순히 받았다
절을 여러 번 하며 떠났다
그 뒤로 노인은 1호선 전철역 검은 출구 앞에도
약국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 시집 《빛을 그리다》 (시와반시, 2010)
[감상]
약국은 건축법상 1종 근린생활시설이다. 근린시설이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설을 말한다. 1종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고 우리 동네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생활시설로, 약국 하는 분들에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슈퍼마켓이나 빵집, 미장원 등과 함께 소매점처럼 분류된다. 약국이 '점빵'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가게'임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치료를 위해 약을 사러오는 사람 말고도 별의별 사람이 다 들락거리는 곳이 약국이다. 불우이웃에서부터 대놓고 구걸하는 걸인, 대중없이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 넉살 좋게 차비 빌려 달라는 사람, 눈치 슬금슬금 봐가면서 ‘비아그라’를 찾는 노인, 작은 목소리로 임신진단키드를 찾는 젊은 여성, 판피린이나 박카스를 습관적으로 상용하는 단골들...
박복조 시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매일 대하며 약국을 운영했던 약사 시인이다. 이 시는 그 군상들 가운데 한 ‘박카스 손님’을 눈여겨 추적한 임상기록이라 하겠다. 속에 큰 울화통을 지니고 사는 한 노인네가 그 갈증을 박카스 한 병 따 마시는 것으로 다스리곤 했으나 그마저 나중엔 여의치 않음을 목격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박카스다'라는 유명 광고카피에서의 ‘박카스’란 피로를 회복시켜주고 원기를 북돋우고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란 은유가 있다. 박카스는 국내 단일 의약품 중에서 수십 년째 매출 1위를 기록한 장수 품목으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지만 세상엔 박카스 따위로는 구제 못할 새까맣게 타들어간 속들이 우리 주위에 널부러져있다.
오늘이 사회복지의 날이란다. 이 날이 사회복지인들을 위한 날인지 사회복지의 손길이 덜 미치는 곳이나 더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자고 결의하는 날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분배의 정의를 신봉하고 실현해가는 다짐이 꼭 필요한 때다. 가진 자의 잉여가 그들에게 선망이 아닌 원망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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