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2021.12.28)

푸레택 2021. 12. 28. 10:22

■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감상]
 
많은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잊혀졌다. 세월이 강력한 문화와 편익을 동반하여 몰아내고 데려갔다. 사라지고 사라지는 가운데 우리는 있다. 못 느끼는 사이 우리도 사라지지 않으려고 함께 안간 힘을 썼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야 슬그머니 실눈으로 되돌아보는 것인데, 사라진 것들이 흑백의 영상으로 빠르게 스쳐간다. 그 가운데 세월이 가도 그리운 것들은 가끔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게 하고 잠이 쉬 들지 않는 밤에 몸을 뒤척이게 한다.

이 시에서처럼 골목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데는 20년이 채 안 걸렸다. 거의 모든 골목문화가 사라졌고, 골목경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몇몇은 힘겹게 기억을 헤집고 먼지를 털어낸 후 그 앞에 푯말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제가 된 시간의 유물일 뿐 달리 양질의 감성을 촉발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앞으로 사라질 더 많은 것들과 힘겨운 동거를 하고 있으며,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들의 목록은 늘어날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기록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이것들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것이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훗날 치명적 그리움으로 고스란히 남지는 않을 것이다. 더러는 아쉬운 표정인 듯 보여도 실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일 뿐, 대체로 개선과 개량으로 대체되어 삶의 질이 떨어지거나 향유가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보존되어야 할 것이 있다. 함부로 뿌리를 뽑아서는 안 될 게 있다. 개발이 아무 곳에서나 미명일 수는 없다. 어느 아름다운 포구가 그렇고 해안선이 그렇고 개펄이 그렇고 나루터가 그렇다. 한번 손을 댔다하면 자국은 깊고 구멍은 커진다. 우리들 가슴에도 숭숭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고 사라져도 좋은 것은 과감히 걷어내는 게 문화의 기초 작업이다. 그 분별력이 문화마인드다.

‘피터 드러커’가 예언한 문화전쟁의 시대인 21세기를 살아가는 경쟁력이다. 오래전 버린 대한늬우스를 대국민 계도용으로 다시 끄집어내려했던 생각은 얼마나 유치한 비문화적 발상이었던가. 정작 버려야할 것은 따로 있고 간직해야할 것들도 따로 있다. 광복 70년을 맞아 편중된 특정 계층의 경제적 풍요와 외적 성장의 결과치만 줄줄이 내놓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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