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고시조] (144) '귀거래 귀거래한들' 이정보(李鼎輔) (2021.12.12)

푸레택 2021. 12. 12. 20:37

■ 귀거래 귀거래한들 - 이정보(李鼎輔)

歸去來 歸去來한들 물러가니 긔 누구며
功名이 浮雲인 줄 사람마다 알건마는
世上에 꿈 깬 이 없으니 그를 구슬허 하노라 

[뜻풀이]     

*귀거래(歸去來): 도연명(陶淵明)의 에서 온 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
*긔: ‘그이’의 준말. ‘그 사람’을 조금 높여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이다.
*공명(功名): 나라에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림.
*부운(浮雲): 뜬 구름. 허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世上):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
*구슬 허하노라: ‘구슬퍼 하노라’의 옛 말투. ‘구슬허’는 처량하고 슬퍼하다는 뜻이다.

[풀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들을 잘들 뇌이지만, 사실 그렇게 물러간 사람이 그 누구였던가? 공명이라 함이 뜬 구름이나 다름없이 허무한 것인 줄은 사람마다 다 알고 있건마는, 그래도 그 허무한 공명의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곤 세상에 없으니, 나는 바로 그 점을 처량하고 슬프게 여길 따름이다.

[지은이]

이정보(李鼎輔: 1697~176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보객정(報客亭). 아버지는 호조참판 우신(雨臣),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1) 진사시에 합격하여 익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퇴했고,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1736년 사헌부 지평으로서 탕평책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부수찬에 기용되어 부제학·대사간·대사성·승지를 역임했고, 1750년(영조26)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여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뒤 이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만년에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엄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하여 여러 번 파직당했다. 문에서는 주의(奏議)와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고, 시조에서는 평시조 뿐만 아니라 사설시조와 엇시조에도 능했다. 총99수의 시조가 여러 시조집에 실려 있으며, 그의 시조는 회고류가 가장 많다. 이 가운데 역사상 뛰어난 인물에 대한 회고와 추모를 나타낸 20여 수는 착상이 독특하다. 이외에도 탈속의 경지와 흥취있게 노는 것을 동경하거나, 늙어감을 서러워하고, 애정을 노래하는 등의 다양한 주제로 되어있다. 소재나 시어도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특히 사설시조는 내용과 소재, 시어의 면에서 파격적이라 할 만큼 사대부 시조로서의 기풍을 벗어났다. 이는 위항의 가객들과 가까이 하며 시조를 즐겼기 때문에 시풍이 근엄한 격조에서 벗어나 당시 유행하던 풍류적 경향에 가깝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대를 최후로 장식한 사대부 시조 작가로서, 시조의 주축을 평민층으로 옮기는 교량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

도연명(陶淵明):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淵明)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 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송서》 은일전(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 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귀거래서》 서(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 《귀전원거오서》이다.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 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원문]일소일빈 (daum.net)

 

일소일빈

한자는 우리글이다

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