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2021.12.10)

푸레택 2021. 12. 10. 19:20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되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한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시집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감상]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감사해야할 일만큼이나 이토록 사죄해야할 것도 많다. 결국 우리는 이렇듯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염치불구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영남대 교수를 지낸 시인의 성찰과 참회는 속죄라기보다는 그렇게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성숙한 자아에 그 방점이 놓여야할 것이다. 인격의 성숙은 타인에게 감사한 마음과 송구한 마음을 품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살다보면 나의 작용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로부터 덕을 입는 경우가 있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맺은 숱한 인연들 가운데서 나로 인해 서운하고 마음상한 사람이 없다고는 누구라도 장담 못한다. 고마운 일에 인사가 소홀했을 수도 있고 미안한 일이 있음에도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경우도 수두룩했으리라. 본의 아니게 못 알아본 사람, 오랜 연락 두절로 서운한 친구도 있을 것이며 내 불찰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도 있으리라. 무심히 내뱉은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상했던 사람도 있겠고, 나의 짧은 생각과 패착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친 일도 물론 있으리라. 지금도 마음갈피를 헤아리지 못해 섭섭한 사람이 있음을 안다.

발밑에 밟힌 풀벌레에게까지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다 해서 유난 떤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생적 관계를 맺고 있다. 갯벌이나 습지가 생명력을 잃는다면 우리 인간도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하물며 인류 공동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구조적 병폐와 인간의 탐욕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고귀한 생명들을 잊지 못하며, 세상의 모든 참사가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참혹도 타인의 개별적 슬픔도 나와 무관치 않다.

60년대 초 국제신보가 창간1주년을 기념하여 시민위안 무료잔치를 공설운동장에서 벌였다가 밀려든 인파에 여러 명이 압사한 참극이 빚어졌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 선생께서 신문사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그는 이 돌발사고로 인한 비통함에 애도와 사과의 글을 일주일간 싣겠다고 신문사 사장에게 알린 뒤 쓰기 시작한 사설이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여기서 그의 진한 휴머니즘과 작가적 역량을 눈여겨본 김동리 선생께서 본격적으로 소설쓰기를 권유했던 것이 그가 소설가로서의 대장정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어제 서해상에서 있었던 인공강우 실험이 성공을 거두진 못한 것 같다. 하늘에서 비 한 줄기 내리게 하는 것도 여전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이다. 4-50년 전만해도 누가 지금처럼 병에 담은 물을 매일 사마시리라고 상상했겠나. 높은 굴뚝에서 연기와 가스를 쿨쿨 내뿜어도 누가 미세먼지를 걱정하고 마스크 쓸 생각을 했던가. 칙칙폭폭 석탄기차가 달릴 때도, 산골 외딴 오두막의 밥 짓는 연기도 모두 정겨운 그림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로 말미암아 세상의 공기가 탁해지는 일이 없는지 돌아봐애겠다. 자연과 사람에게 겸손하고 햇빛에 사죄하면서 세상의 수많은 고마운 일들에도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 꼭 그렇게 하겠노라는 약속은 못하더라도 염치는 차려야겠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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