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돌의 정(情) / 윤오영(尹五榮)
눈이 펄펄 날리는 벌판을 끝없이 걷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불을 끄고 희미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면 소창素窓 밖에서 지금 끝없는 백설이 펄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밤에 말없이 다소곳이 앉은 여인과 있어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화로에 찻물을 올려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바글바글 피어나는 맑은 향기에서 고운 여인의 옥양목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끝없이 아득한 옛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골통대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러면 선향線香 같이 피어올라 안개 같이 퍼지는 속에서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맴도는 것이다. 달밤에 호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나는 한길로 난 들창을 열고 넓은 터를 내다본다. 그러면 높은 외등이 달빛같이 비쳐 광장에 호수같이 고여 있는 것이다.
혀끝으로 다향을 음미하며 책상머리에 앉으면, 누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며 찾아올 것만 같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잊었던 옛 친구를 생각한다. 서랍을 열고 묵은 원고를 들춰, 다시 읽어보면 옛 얼굴이 목화송이처럼 떠오르고. 책은 손때 묻은 책이 정겨웁고, 붓은 손에 익은 만년필이 좋다. 여러 번 읽던 책이 옛 친구같이 반갑고, 전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로우며, 손에 익은 붓이 하얀 원고지 위에 솔솔 흘러내리는 푸른 글씨가 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방은 넓지 않아 오히려 아늑하고, 반자 무늬는 약간 그을은 것이 오히려 그윽하다. 천길 만길 깊이를 모를 해저, 구만리 창공 끝없는 허공이 그리운 때면, 나는 베개 위에 고요히 누워 눈을 스르르 감아보는 것이다.
“두 사람이 대작하매 산꽃이 핀다 兩人對酌山花開.” 친구와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싶고, “홀로 경정산에 앉다 獨坐敬亭山.” 산악이 그리운 때면, 책상머리에 도사리고 앉아 책갈피를 제쳐가며, 회심의 글귀와 쾌재의 문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 한 칸 온돌방의 정서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왕유나 도연명의 경지를 얻지 못하여, 白香山(白居易의 호)의 세간에 대한 관심과 완사종阮嗣宗(阮籍의 자)의 미친 버릇을 버릴 길이 없어, 때때로 뛰쳐나와 가로수 밑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다.
◇ 수필가 윤오영(尹五榮, 1907~1976)
동양의 고전수필을 바탕으로 한국적 수필문학을 개척한 수필가·교육자. 호 치옹(痴翁)·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 서울 출생. 주요저서 《고독의 반추》 《수필문학입문》, 주요작품 《방망이 깎던 노인》 《달밤》 《양잠설》 《마고자》
수필 창작과 이론전개에 힘써 현대 수필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수필가이다. 호는 치옹(痴翁)·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다. 190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양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28년 양정고보(養正高普)를 졸업했으며, 보성고보(普成高普)에서 20여 년 동안 교직생활을 했다.
1959년 문학잡지인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厠上樂)》을 발표한 이래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했다. 50세가 지난 후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해 20여 년 동안 수필과 평론을 끊임없이 발표해 필봉에 신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달밤》 《방망이 깎던 노인》 《마고자》 《양잠설》 《온돌의 정》 《곶감과 수필》 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1972년 3월에 창간된 《수필문학》에 《수필문학의 첫걸음》과 《수필문학강론》을 연재하고, 이론서인 《수필문학입문》 등을 통해 수필문학관을 피력하며 수필문학의 이론정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므로 잡문이나 만필(漫筆)과는 구분되어야 하며, 타장르의 작가들처럼 습작과 문장수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74년 10여 년 동안 발표한 작품을 엄선해서 첫 수필집 《고독의 반추》를 출판함으로써 한국 수필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을 동양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정취를 이룬 작품들은 전통에 연결된 우리 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증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간체의 특장을 잘 살린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와 시각적 이미지가 빼어난 서정적인 문장은 여백의 함축미가 돋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이루어낸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저서에 《수필문학강론》 《수필문학입문》 등의 이론서와 수필집 《고독의 반추》 《방망이 깎던 노인》 《조약돌》 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노계가사의 재평가〉 〈동양윤리고(東洋倫理考)〉 〈구지가〉 〈아리랑〉 〈춘향전〉 〈연암문장〉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두산백과》 발췌
【작품경향】
윤오영의 수필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동양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정취를 이룬 작품들은 전통에 연결된 우리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증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간체의 특장을 잘 살린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와 시각적 이미지가 빼어난 서정적인 문장은 여백의 함축미가 돋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이루어낸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주로 토속적인 제재를 사용하여 동양적인 인생관의 가치를, 고전의 세계와 조응되는 한국적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작품 경향은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글을 썼으며, 동양적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담고 있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수필의 창작과 이론 전개에 힘을 쏟으며, 정교한 문장으로 사물을 고전적 세계와 접목시키려 했다. 그는 또 수필은 곧 문장이라고 주장할 만큼 글을 다듬기에 고심한다. 따라서 그의 수필에는 역대 문장가의 여운이 풍긴다.
《수필문학》에 연재했던 「수필문학의 첫걸음」과 「수필문학강론」은 새로운 수필문학 개척에 이정표적(里程標的) 역할을 했다. 그는 수필가이기 이전에 한학자(漢學者)요, 국문학지요, 평론가이다. 국문학을 연구하고 중국 고전을 탐독하는 동안에 그의 수필문학은 이루어졌으며, 수필집 《고독의 반추(反芻)》는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윤오영의 수필 세계】
1973년에 나온 제 1수필집 《고독의 반추(反芻)》는, 그가 조심스럽게 써낸 첫 10 년간의 글에서 추려 낸 것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 수필 문학의 획기적인 이정표(里程標)의 구실을 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전통에 연결되는 우리글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고, 한편 그의 글은 우리의 향수를 풀어 주면서도 청신하고 유려(流麗)하다.
둘째로, 그는 수필이 문학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글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고, 다른 장르의 작가 이상의 수련과 습작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몸소 실천했다.
셋째로, 수필의 생명인 자아(自我)의 경지(境地)를 살려 나가는 점을 뚜렷하게 한 의미를 인식하게 한다. 그의 수필 속에는, 고독에 시달리고, 고독을 음미하고, 고독을 사랑하기도 하는 품위와 기골(氣骨)과 통찰력(洞察力)을 갖춘, 그러면서도 정감(情感)의 순박함을 지닌 지성인으로서의 그의 인간이 투영되어 있다.
수필가 피천득은 윤오영의 수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의 수필이 소재는 다양하다. 그는 무슨 제목을 주어도 글다운 글을 단시간 내에 써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작자의 역량이라고 하나, 보다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이 그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그가 타고난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 그리고 그 기억력이 산물이다.”
【윤오영 문체의 특징】
▶시각적 이미지 : 윤오영의 수필을 읽으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그의 수필이 어떤 사상을 제시하기보다 이미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다. → 달빛이 비치는 시골의 풍경을 성공적으로 시각화하여 보여 주고 있다.
▶여백의 문장 : 윤오영 수필을 읽으면 독자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작자가 작품 속에서 무엇인가 다 말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려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짧지만 의미는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의 문장들이 여백을 내포(內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 달빛의 아름다움 속에서 말이 거추장스러웠다는 현상을 표현한 문장이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 노인이 흡사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자연의 일부처럼 달을 보고 있더라는 광경의 표현이다. 그의 문장 속의 여백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수필집】 《고독의 반추》(1974) 《조약돌》 《방망이 깎던 노인》(1977)
【수필】 <찰밥> <염소> <방망이 깎던 노인> *<달밤> <양잠설> *<마고자> <조약돌> <사발시계> <비원(秘苑)의 가을>
【저서】 《수필문학의 첫걸음》 《수필문학강론》 《수필문학입문》
【평론】 <한국 주방사(廚房史)> <한국의 창(窓) 연구> <연암(燕岩)의 문장> <노계가사(蘆溪歌辭)의 재평가> <동양윤리고(東洋倫理考)> <구비가> <아리랑> <춘향전>
/ 2021.11.14 옮겨 적음
https://blog.daum.net/mulpure/15857459
https://blog.daum.net/mulpure/15857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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