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오영 선생님을 기리며 - 안골은빛수필문학회 김학철
선생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선생님이 가신 지도 어느덧 41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저 같은 필부(匹夫)를 아실 리 없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일합방 3년 전에 태어나시어 36년간의 일제강점기란 암울한 시절과 3년여에 걸친 동족상잔의 참혹한 6.25 전쟁 등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오셨나요?
보성(普成)고등학교에서 20여년간 후학들을 가르치셨고, 3년 늦게 출생한 금아 피천득 선생님과도 교분을 쌓으며 절친하게 지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전에는 ‘마고자’ 즐겨 입으셨다지요?
동대문 맞은 편 길가에서 방망이를 깎던 외고집 노인을 만나 방망이를 깎아 온 일도 있으시고, 달밤에 윗동네로 이사 온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혼자 툇마루에 앉아 있던 노인으로부터 ‘농주’한 사발을 대접받고 오신 일도 있으시지요? 또 소학교 시절에는 원족(소풍)갈 때 모친께서 싸주신 ‘찰밥’을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찰밥’을 좋아하거든요. 이만하면 선생님의 생전 일상생활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는 편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을 다 아느냐고요? 이것은 오로지 ‘수필’이 맺어준 인연 덕분이지요. 만약 수필을 몰랐더라면 저는 선생님의 수필은 물론 선생님 함자조차 모른 채 생을 마칠지도 모릅니다.
6년 전 제 인생의 후반부라고 할 수 있는 60대 중반에 늦깎이로 수필공부를 시작할 무렵, 선생님의 수필집 《방망이 깎던 노인》과 《곶감과 수필》 그리고 이론서인 《수필문학입문》 등을 읽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알리요마는 모든 작품이 주옥같은 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 중 제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작품은 역시 선생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방망이 깎던 노인」입니다. 내용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당시에도 드문 노인이 보여준 투철한 장인정신과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라고 사료됩니다. 그 글에는 생산자인 외고집 노인과 소비자인 선생님 간에 나눈 대화 몇 마디와 노인의 태도 그리고 노인의 진심을 알게 된 소비자가 갖는 심경의 변화가 잘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필에서는 ‘장인정신을 가져라’라든지 ‘양심적인 물건을 만들고 제값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는 등 직선적이고 독자를 가르치는 듯한 말은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명료하고 분명했습니다.
그야말로 ‘무언(無言)속의 웅변(雄辯)’이라 할까요? 특히 저는 이 글을 읽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끝부분에 가서 방망이를 받아 가지고 댁으로 가는 선생님은 바쁘다는 분이 집으로나 빨리 가실 일이지 가다말고 뒤를 돌아다보니 흰 수염 난 그 노인이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더라 하셨지요? 또 그 노인의 진실성을 뒤늦게 알게 된 선생님은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러 그 노인을 찾아갔을 때, 그 노인이 없어 그 노인이 바라봤다는 맞은 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니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면서,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하면서 그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라는 대목입니다. 그 노인은 비록 길거리에 앉아 방망이나 깎던 노인이지만 정신만은 신선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대목에서 저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어요. 어떻게 그 구절을 삽입하셨을까요? 이는 순전히 선생님의 탁월한 구성 능력이 아니었을까요?
선생님이 가신 뒤에도 과학과 물질문명은 계속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오히려 혼탁해지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고나면 무슨 ‘가짜 참기름’이네, ‘중국산 농축수산물이 국산품으로 둔갑해서 팔리고 있네’ 등 유쾌하지 못한 뉴스가 쏟아져 나오는 등 거짓이 판을 쳐,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속이고 속는 끔찍한 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그 방망이 깎던 노인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노인이 보여준 말과 행동은 혼란한 현세에 경종을 울려주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노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더욱 맑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아, 이런 글을 바로 수필이라고 하는구나!’ 수필의 진면목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선생님은 어둡고 긴 고난의 세월을 힘겹게 견뎌 오시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아 마침내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 때는 저도 「마고자」를 입고 갈 것입니다. 선생님께 술도 한 잔 올릴까 합니다. 「달밤」에 노인과 함께 드셨다는 그 술, 바로 ‘농주’ 한 사발입니다. 안주로는 ‘무청김치’는 물론 조선 정조 때 영명위 홍현주의 부인이 창안해 윗분으로부터 크게 찬사를 받았다는 그 ‘깍두기’도 한 접시 가져갈까 합니다.
글을 쓰다 보니 밤이 깊어 갑니다. 장마철이다 보니 비가 창문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빗소리가 들립니다. 수필 「양잠설 養蠶說」에서 느끼셨다는 바로 그 소리, 식욕이 왕성한 누에들의 뽕잎 먹는 소리 말입니다.
이 밤도 평안히 주무십시오.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7. 7. 14.)
/ 2021.11.14 옮겨 적음
https://blog.daum.net/mulpure/15857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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