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가 만들기 / 박연구
쭈.쭈.쭈쭈르르르...
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드나들면서 지저귀는 소리다. 다섯 마리나 되는 새끼들까지 지저귀고 있어서, 집안은 온통 제비 기저귀는 소리로 가득 찬다.
마당에서는 여섯 마리나 되는 강아지들이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며 논다. 볼수록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집에 살 때 개를 길러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 이렇게 여섯 마리나 실패 없이 길러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더욱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마당 앞 담장 가에는 여남은 그루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얼굴로 눈길을 끌고 있다. 어느 나무인들 정이 안가랴만,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나무로는 앵두나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빨간 열매가 많이 달려있는 것이 꽃들처럼 예쁘게만 보인다.
마당 한쪽 어린애 엉덩이만 한 데에는 상추와 쑥갓이 자라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봉숭아 몇 포기가 하얀 꽃 빨간 꽃을 피워주고 있어서 한껏 시골집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아이들은 학교와 직장에 다들 나가고 집에는 아내와 나만 남아서 집을 보고 있다. 아이, 집을 보고 있는 것은 아내이고, 나는 '외가'라는 주제의 수필을 청탁 받고 무엇을 쓸 것인가 고민중이다.
외가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만, 나는 외가 이야기로 수필 한 편을 써볼 생각이 날만큼 좋은 추억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기에, 청탁에 응낙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외가 이야기로 글 빚을 갚아 볼까 했으나, 아이들의 외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왕래를 하지 않다 보니, 우리가 보통 떠올리고 있는 외가의 이미지로 부각시키기에는 알맞지 않을까 싶어서, 잠깐 붓을 놓고 창 밖으로 눈길을 보내 본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는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정겨운 것들이 말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뭐라고 지저귀면서 집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새끼 제비들, 그릇에 삥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귀여운 강아지들, 빨간 열매를 꽃처럼 달고 있는 앵두나무, 손톱에 꽃물 들이던 소녀가 생각나는 봉숭아, 그리고...
문득 제목부터 떠올랐다. '외가 만들기'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내 집이 외가가 되는 꿈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아내가 내게 와 준 나이를 생각할 때, 큰딸과 작은딸은 벌써 결혼해서 아이를 한둘 두었음직하다. 그러니 나의 '외가 만들기' 설계는 현실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고 있는 외가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어린 오누이가 시오리쯤 걸어가서, 마루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쭉쭉 뻗고 서 있는 동구 앞을 지나, 산자락 밑에 엎디어 있는 어느 초가에 들어서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우리 강아지들 왔구나!" 하고 반색하며 맞는 집. 아니면 버스로 오십 리쯤 가서 내려, 어미소와 새끼소가 풀을 뜯어먹고 있는 냇가 둑길을 가다가, 원두막이 있는 참외밭을 지나, 들길 가운데 있는 동네의 한 집을 찾아들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물론, 외삼촌과 이모가 반색하면서 맞이하는 집이 바로 외가다.
내 집이 그런 정경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이면서 교외나 다름없이 산이 있고, 풀밭이 있고, 공기가 맑아서, 장차 외손자들의 외가로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되도록이면 딸들을 그리 멀리 시집을 보내지 않겠고, 외손자들이 찾아오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아이에게 우표수집, 성냥갑 모으기 같은 취미를 가지게 하는 것도, 좋은 외가가 되게 하는 배려이기도 하다. 조카들이 올 때마다 모아 둔 우표와 성냥갑을 약간씩 선물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또 아이들에게 자연 학습을 시켜주기 위해서는 외삼촌이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
오늘 아침만 해도 뒷산으로 함께 산책을 나가서 산딸기를 따먹게 하고 개암도 가르쳐 주면서, 옛날의 아버지가 소년 시절을 보낼 때에 즐겨 까먹던 산열매라고 자상한 설명까지 해준 일 역시, 좋은 외가가 될 수 있는 일련의 준비 과정에 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방학이 되면 딸들은 제 아이들을 외가로 쫓을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콘크리트 건물들만 눈에 띄는 삭막한 환경인지라, 방학 동안만이라도 자연에 접할 수 있게 하고, 곤충 채집이며 식물 채집 등 방학 숙제도 외가에 가면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말이다.
우리 속담에 ‘외갓집 들어가듯 한다’는 말도 있지만 외손자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저의 집보다도 만만한 집으로 여기고 있었던 만큼, 들어서자마자 앵두나무로 가서 마구 따먹는 놈, 강아지들을 못살게 굴면서 그 중 한 마리를 자기가 가지고 가겠다고 달라는 놈,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예쁘게 들여달라고 제 이모에게 성화를 대는 놈들 때문에 우리 집은 매우 소란해 질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잖아도 적잖이 다섯이나 아이들을 기르느라고 편할 날이 없었던 아내는, 말썽꾸러기 외손자 놈들에게 이제 그만 너희 집 가라고 야단을 치겠지만, 나는 좀 더 놀게 놓아두지 그러느냐고 핀잔을 줄 것이다. 애들은 야단치는 외할머니나 핀잔주는 외할아버지 소리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희들 마음대로 떠들고 놀 것이라고 상상해 보면, 지금부터 유쾌해지기만 한다
글=박연구 수필가
◇ 작가 소개
박연구(朴演求, 1934~2003): 전남 담양 출생. 광주고등학교 졸업. 1963년 『신세계』 신인작품모집에 수필 「수집취미」가 입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현대수필』 및 『수필문학』의 주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집으로는 『수집취미』(1963), 『바보네 가게』(1973), 『어항 속의 도시』(1976), 『햇볕이 그리운 계절』(1978), 『환상의 끝』(1981) 『사랑의 발견』(1985)이 있다. 평론 「한국수필문학의 현황」, 「김교신과 수필문학」, 「수필적 김소운론」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제5회 현대수필문학상(1987), 한국수필문학상(1991)을 수상하였다.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권영민)
/ 2021.11.0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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