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수목' 이태준 (2021.11.04)

푸레택 2021. 11. 4. 15:28

■ 수목 / 이태준

   몇 평 안 되는 마당이나마 나무들과 함께 설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울타리 삼아 둘러준 십수 주(株)의 앵두나무를 비롯하여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와 모란, 백화(白樺)의 한두 그루들, 이들은 우리집 모든 식구들이 다 떠받들어 옳은 귀한 손님들이다.

   우리에게 꽃을 주고, 우리에게 열매를 주고, 또 푸른 그늘과 그 맑은 향기를 주는 이들은, 우리에게서 받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가물면 물을 좀 주는 것이나, 추우면 몇 나무의 밑등을 짚으로 싸주는 것쯤은,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그 아름다움과, 그 맛남과 그 향기롭고 서늘함에 비겨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느 친구나 어느 당자인들 우리에게 이처럼 주기만 하고 받음이 없음에 태연할 것인가. 자연이 나무를 통하여 우리를 기르고 우리를 가르침은 크다.

   나무들은 아직 묵묵히 서 있다. 봄은 아직 몇천 리 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 아래 가까이 설 때마다 나는 진작부터 봄을 느낀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 잡아보면 그 도틈도틈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細雨)만 내려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

   우리 식구들은 앵두가 익을 때마다, 대추와 감을 딸 때마다, 이 집이라기보다 마당을 우리에게 전하고 간 그전 주인을 생각한다. 더구나 감나무는 우리가 와서부터 첫열매가 열린 것이니 그들은 나무만 심고 열매는 따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남의 밭에 들어 추수하는 미안이 없지 않다. 나는 몇 번이나 불란서 어느 작가의 '인도인의 오막살이'라는 작은 이야기 한 편을 생각하였다. 어떤 학자가 세계를 편답(遍踏)하며 진리를 찾는 이야기인데 필경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서 폭풍우를 만나 한 인도인의 오막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막살이의 주인은 '파이리아'라는 인도 최하급의 천족(賤族)으로서 그의 생활은 문화와 완전히 절연(絶緣)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자는 이 '파이리아'에게서 어느 고승거유(高僧巨儒)에게서도 얻지 못하였던 진리의 한끝 실마리를 붙들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 중에 '파이리아'의 말로 다음과 같은 뜻의 구절이 아직 기억된다.

   ㅡ 나는 어디서 무슨 열매를 주워 먹든 반드시 그 씨를 흙에 묻고 옵니다. 그건 그 씨가 나서 자라면 내가 다시 와 따 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와 따 먹든 상관없습니다. 오직 그렇게 함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뿐입니다ㅡ.

   얼마나 쉽되, 거룩한 일인가! 우리 마당의 그전 주인도 그 파이리아와 같이 천의(天意)에 순(順)하려 이 마당에 과실씨를 묻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아무튼 그들이, 보기 좋고 맛있고 또 따는 재미만도 좋은 여러 과실나무를 우리에게 물려주고 감은 우리 식구들이 길이 잊을 수 없는 은혜다.

   그러나 나는 또한 가끔 생각을 달리하여 얼마의 불만을 갖기도 한다. 내 과욕인지 모르나 그전 주인들이 작은 나무 여럿을 심었음을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따먹는 것은 없더라도 작은 여러 나무보다는 큰 한 나무 밑에 거닐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무는 클수록 좋다. 그리고 늙을수록 좋다. 잔가지에 꽃이 피거나, 열매가 열어 휘어짐에 그 한두 번 바라볼 만한 아취(雅趣)를 모름이 아니로되, 그렇게 내가 쓰다듬어줄 수 있는 나무보다는 나무 그것이 나를, 내 집과 마당까지를 푹 덮어주어 나로 하여금 한 어린아이와 같이 뚱그래진 눈으로, 늘 내 자신의 너무나 작음을 살피며 겸손히 그 밑을 거닐 수 있는 한, 뫼뿌리처럼 높이 솟은 나무가 그리운 것이다.

   현인(賢人) 장자(長者)들이 살던 마을이나 그들이 거닐던 마당에는 흔히는 큰 나무들이 선 것을 본다. 온양에 이 충무공이 사시던 마을에도 그가 활쏘던 언덕이라는 데 절벽과 같이 훤칠히 솟은 두 채의 은행나무가 반은 고목이 되어 선 것을 보았다. 나는 충무공이 쓰시던 칼이나 활이나 어느 유품보다 그 한 쌍 은행나무에 더 반갑고 더 고개가 숙여졌다.

   늙기는 하였으되 아직 살기는 한 나무였다. 말이야있건 없건 충무공과 더불어 한때를 같이한 것으로 아직껏 목숨을 가진 자 ㅡ 그 두 그루의 은행나무뿐이다.

   나무는 긴 세월을 보내며 자랄 대로 자랐다. 워낙 선 곳이 언덕이라 여간 팔힘으로는 풀매를 쳐 그 어느 나무의 상가지도 넘길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높고 우람한 거목이기 때문에 좋았다. 아무리 충무공이 손수 심으신 것이라 하여도 그 나무가 졸망스런 상나무나 반송(盤松) 따위로 석가산(石假山)의 장식거리나 될 것이었으면 그리 귀할 것 아니었다. 대무인(大武人)의 면목답게 허공에 우뚝 솟기를 산봉우리처럼 하였으니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다못 한 그루의 나무라도 큰 나무 밑에서 살고 싶다. 입맛을 다시며 낮은 과목 사이에 주춤거림보다는 빈 마음 빈 기쁨으로 오직 청풍이 들고날 뿐인 휘영청한 옛 나무 아래를 거닐음이 얼마나 더 고상한 표정이랴! 여름에는 바다 같은 그 깊고 푸른 그늘 속에 살고 가을에는 마당과 지붕이 온통 그의 낙엽으로 묻혀 보라. 얼마나 풍성한 추수리요! 겨울밤엔 바람 소리 얼마나 우렁차리요! 최대 풍금의 울림일 것이다. 실낱같은 목숨이나마 그런 큰 나무 밑에 쉬어, 먼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앞날을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1937년 作)

/ 2021.11.04 옮겨 적음

[사진출처] 투빛나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