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소는 불행하다' 김동명 (2021.11.04)

푸레택 2021. 11. 4. 15:15

■ 소는 불행하다 / 김동명
    
아직도 먼동이 트기 전이니 새벽 네 시쯤이나 되었을까. 논 밭 건너 신작로로부터 달구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저께 도로묵이 많이 났다더니 아마 그걸 싣고 함흥(咸興)장으로 팔러 가나부다. 어제 하루의 멍에 자국이 채 풀리기도 전에, 또 이른 새벽부터 채찍을 받아야 하다니…….

소,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짐승이 또 있을까?

자유로운 천지에서 독생독래(獨生獨來)로 거칠 것이 없이 일생을 보내는 산짐승들은 말 말고, 우선 사람의 손에서 길리우는 집짐승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이렇듯 억울하고 처참하게 살아가는 짐승은 다시 없을 것이다. 말이나, 개나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돼지같이 못생긴 놈까지라도 소에게 비긴다면 얼마나 좋은 팔자인가.

그 등에 제왕이나 장상을 앉히고도 장안대로(長安大路)를 위풍이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영광과 호사(豪奢)는 저마다 바랄 수 없는 일이매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가인(佳人)에게 고삐를 이끌리어 흐느적 흐느적 만책(漫策)도 흥겨웁거니와, 때로는 네 굽을 안고 환호(歡呼)의 우뢰(雨雷) 속을 달려, 용맹과 쾌속을 천하에 과시하는 장쾌한 맛이란 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 수 없으리라. 설령 운수기박(運數奇薄)하여 구저분한 잡역이나 고역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에게 아낌과 고임을 받는 분수로는 소에 비길 바 아니요, 더욱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은 더욱 소에 견줄 바가 아니다.

봄볕이 간지러운 묏기슭이나, 흰 눈이 듬뿍 쌓인 벌판에서 개들의 엎치락뒤치락하며 어우러져 노는 양을 구경하고 섰노라면, 그것은 정히 생명의 환희 그대로라는 느낌을 우리로 하여금 자아내게 하고야 마는 것이다. 개는 또 명랑하고도 다정한 천품(天稟)이 빚어 주는 애교 때문에 흔히는 주인의 총애를 받는다. 혹시 아이들과 자브렁거리거나 또는 주둥이 버릇이 나빠서 고무신짝이나 장작개비에 볼기짝을 얻어맞는 수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까짓 것이 소의 가지가지의 수난에 견줄 바가 못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다못 한 가지 서글픈 일은 불행히도 인정머리 없는 주인이나 만나고 보면 흔히는 제 명에 죽지 못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온종일 따뜻한 햇볕을 따라 낮잠이나 자고 모양이나 내고 울밑을 산책하며 기지개나 켜다가 밤이 되면 연애와 수렵으로 갖은 향락을 다하는 것이 고양이의 일생이니, 이만하면 상팔자가 아닌가.

외양부터 자못 어두운 느낌을 주어 어딘지 모르게 저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돼지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이 불결한 감방 속에서 우울하게 인생을 보내는 신세이기는 하나, 그래도 사는 날까지 조석으로 주인댁의 깍듯한 서비스와 함께 푸근한 짚자리와 걸죽한 시궁창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팔자니, 그 안일한 점으로 보아 소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면 소는 어떠한가? 설사 행복스러운 한 시절로서의 송아지 때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후일의 추억으로 말미암아 그 불행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한 개의 커다란 수난을 맞이하는 서곡으로서의 송아지 시대를 넘기기가 바쁘게 그 목덜미에서는 멍에가 벗어질 날이 없고, 그 몸에서는 채찍이 떠날 날이 없이, 고역에서 고역으로 혹사에서 혹사로 이리 시달리고 저리 부대끼는 것이 소의 일생이 아니던가. 그것은 실로 연옥(煉獄)에서의 무서운 참고(慘苦)와 가책(苛責)을 방불케 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주인을 위하여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데 무엇이 그리 고통될 게 있겠느냐고 차라리 저들은 거기에서 일종의 만족감을 느낄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에게 반문하리라.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에 집더미 같이 육중한 짐짝을 끌고 오르막길에서 혀를 빼어 물고 헐떡이는 소를 본 일이 없느냐고. 찬바람이 살을 에이는 엄동설한에 허리가 휘이도록 짐을 실은 채 앞발이 눈 속에 빨려 오도가도 못하는 소를, 얼음판에 꼬꾸라져 달구지에 눌린 채 두 눈이 휘둥그래서 버둥거리는 소를 본 일은 없느냐고 -.

지난 가을에 나는 잠깐 백운산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때 용흥사(龍興寺)로부터 환희사(歡喜寺)로 넘어오는 도중에 상당히 가파로운 곳에 달구지 지나간 자국인 듯한 것이 있기로 동행하는 이에게 물었더니, 역시 달구지 자국임에 틀림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놀랐다. 오르막길엔 빈 몸이니 그다지 위험치는 않다 하더라도, 이제 생나무를 한 바리해 싣고 내려올 때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곡예 이상이라고 한다. 나는 그때 우리의 전형적인 늙은 무저항주의자를 위하여 크게 분격을 느꼈다. 그리고 그 좋은 힘을 가지고도 놈팽이들을 땀이 쭉 빠지도록 한번 톡톡히 골려 주지 못하는 저의 못난 천성에 대하여 나는 실상 연민보다도 더 많이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여기에 이같이 소의 불행론을 장황히 피력하기로 한 것도 아마 그때에 느꼈던 바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무릇 노역이 행복은 그만 두고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힘에 맞아야 하고, 둘째 적당한 시간과, 그리고 또 적당한 휴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한 짐승을 위하여 이러한 조건들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다. 초년은 비롯 곤고하게 지낼지라도 말년 신세나 평안하면 세상에서는 그 역시 좋은 팔자라고들 한다. 그러면 온갖 혹사나 고역으로 소장기(少壯期)를 보내게 되는 저 참을성 많은 짐승에게 안한(安閑)한 말년이나마 있던가. 등가죽이 벗어지도록 짐을 싣고 목덜미에 썩살이 박히도록 멍에를 매었건만, 드디어 노쇠하여 사람들의 소욕(所慾)을 채워 줄 수 없는 몸이 되고 보면 그 적엔 푸주간에 끌려 들어가 그 장배기에 백정의 쇠메를 받아야 하는 것이, 허연 칼날에 사지를 찢겨야 하는 것이 소의 말로가 아니던가? 한평생 찍소리 한 마디 없이, 살이 찢어지고 뼈가 휘도록 봉사해준 짐승에게 마지막으로 갚은 것이 기껏 이것이라면, 이렇듯 잔인 포학한 인간에게 불행이 따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푸주간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는 소의 뒷모양, 그 비명, 그 전율 그 뒤에 채찍을 들고선 건, 보라, 인간이 아니냐 ! 이것은 분명히 한 개의 전율할 만한 광경임에 틀림없다. 이러고도, 인간의 역사가 비극적이 아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으랴.

드디어 그 머리 위에 쇠메가 떨어질 때, “으앙”하고 지르는 큰 소리는 춘원이 이른바 “내 일을 이루었다”가 아니라 “무도(無道)한 인간들에게 화(禍) 있으라 !” 하는 저주의 소리가 아닐까?

아아 불행한 짐승이여 ! 네 이름은 소니라.

[출처] 『隨筆文學』 1995년 6월호 《韓國名隨筆選 1》에서

글=김동명(金東鳴) 시인 (1900~1968)

아호 招虛. 강원도 출생. 함흥 영생중 졸업,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 수료. 소학교 교원. 동광학원장. 이화여대 교수. 참의원 의원.

저서: 《나의 거문고》 《파초》 《진주만》 《삼팔선》 수필집 《世代의 삽화》 외

/ 2021.11.0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