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심부름' 박성우,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2021.10.27)

푸레택 2021. 10. 27. 21:32

■ 심부름 / 박성우

누나는 고삼이다
반에서 일이등 하는 고삼이다

그런 누나가 뜬금없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뒤에서 오등 정도 하는 내가
밤늦게 만두 심부름을 갔다

너무 늦어서 이 골목 저 골목
문 닫지 않은 만두집을 찾아 헤매다가
큰 사거리 근처까지 나가서 겨우 샀다

만두가 식을까 봐 뛰어서 집으로 갔다

심부름 가서 딴짓하다 늦게 왔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었다

난 뒤에서 오 등이니까,
말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잤다

- 박성우 《난 빨강》 (창비, 2010)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 1998)

/ 2021.10.2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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