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이사' 허연, '이사철' 김명수, '이사 전날' 이승하 (2021.10.27)

푸레택 2021. 10. 27. 21:08

■ 이사 / 허연

아이들이 앞바퀴만 남은 자전거를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때아닌 눈발과 함께 나선 길엔
백목련도 담쟁이도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버릴 것 버리고 쓸 만한 것들만 다시 싸 들고
성북동에서 만난 세월은
낡은 선반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부풀리고 썩어 가는 보이지도 않는
슬픔이라고, 쏟아지는 먼지 같은 거라고

비둘기가 떠난 마을
흙탕물이 쓸려 지나간 자리엔
주저앉으며 일어서며
다시 살아가는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 이사철 / 김명수

장마비 그친
선선한 가을철
서울에서는 또 이사철이 되네

골목마다 두세 집
새 집을 찾아
저마다 부산하게 짐을 싸는데
우리 앞집 다섯 식구 지하실 방도
어느덧 기한이 차
이사를 가네

짐이라야 변변한게 따로 있으랴
남루한 옷궤짝
이불 보퉁이
담장 곁에 죄진 듯 쌓아놓은 채
부르러 간 용달차를 기다리고 있다

지나간 일년 보증금은 올라
그나마 이곳에도 살지 못하면
어디 가서 저만한 방 다시 구하랴

크는 자식 부산하게
뛰어논다고
집을 가진 주인들이 방을 내줄까

몇 달을 벌이 없던 중년 사내는
남의 눈이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찌든 얼굴 아낙만 허둥대는데

한가닥 눈물겨운 아픈 정경은
부모 마음 알 리 없는
어린 것들이
철없이 기뻐하며 깝신거리네

- 김명수,​ 『피뢰침과 심장』 (창작과비평사, 1986)

■ 이사 전날 / 이승하

손때 묻은 가구를 마저 버린다
처박혀 있어 처음 보는 그릇과 냄비도 버리고
구석구석 쌓인 기억의 먼지와도 마침내 이별이다

창을 열면 다가오던 뒷산 산허리
내 눈길로 어루만져 주곤 했는데
집 앞에서 우두커니 날 기다리던 단풍나무
잎사귀의 색깔로 계절을 알았는데
나 이 집 팔고 너희 곁을 이제 떠난다

어머니는 이삿짐을 싸지 못했다
이빨 빠진 접시도 맞지 않는 옷도
버리지 못해 또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조만간 허물어질 언덕배기의 집
물지게를 버릴 수 있어 우린 마냥 좋았는데

첫아기 안고 들어온 이 집을 떠나는구나
내일이면 저 천장이 다른 천장일 텐데
마음은 언제까지나 이 집 근처를
배고픈 승냥이처럼 떠돌 것 같다

- 이승하, 『생애를 낭송하다』 (천년의시작, 2019)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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