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 / 김명인
하루, 한나절 걸려 장롱이며 앨범 속 사진까지
죄다 태우고 남겨놓은 것이 적을수록
더욱 휑한 실내등도 꺼버렸다
현판을 내리고 종각에서 종을 떼어낸 뒤
덕지덕지 그을음이며 먼지
1톤 트럭에다 쓸어 담고
그 차에 아내를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낸 뒤
새 주인 올 때를 기다린다
어머니는 어째서 이 외진 산골에 기도원을 세웠을까
기도란 외로워서 바치는 구애(求愛)일까
열어젖힌 기도실이며 방마다
한때 펄펄 끓었던 소망들 흔적 없고
절절함조차 비운 마음들만 그림자처럼 기어 나와
함께 마루턱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라볼 것이 많을수록 등 뒤가 허전하리니
눈 아래 들판 비로소 아득해 보인다
어제까지 내 눈높이에 맞추던 이 풍경들
어느 시야에 들어 다시 출렁거릴 날들 기약하느냐
-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
■ 이사 / 장철문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을 나선다
책과 책상을 꾸리고
옥상에서 내려온 장독 몇개를 받아서
그 중에서 눈곱만큼 살림이 펴면서
헌옷만 입고 헌책만 보고
헌책상만 썼다고
눈물바람으로 사주신 책장과
옷가지도 있다
테이프로 봉해진 사과박스 속에는
아버지의 필사본 『동국사기』와
할아버지의 생계를 달았던 저울도 있다
어머니는 짐칸 난간을 붙들고
잘 살아라, 잘 살아라 하지만
당신은 곧 아들이 없는 방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 곁을 떠나서 몇 년,
몇 번의 이사에도
서른세 해 하루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가 들어나르고
어머니가 지은
한 채의 집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미끄러져 가듯이
당신도 당신의 한채의 집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 장철문, 『산벚나무의 저녁』 (창비, 2003)
■ 겨울 이사 / 송수권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통수를 유난히 쓰다듬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오지 않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는 의문을 제기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걷히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폐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봐라 또 누구는 겁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우 돕기 만 원을 빼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지게 써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홀짝
커피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을 따라가며
기죽기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하리라
- 송수권,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7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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