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이사' 김명인, '이사' 장철문, '겨울 이사' 송수권 (2021.10.27)

푸레택 2021. 10. 27. 20:49

■ 이사 / 김명인

​하루, 한나절 걸려 장롱이며 앨범 속 사진까지
죄다 태우고 남겨놓은 것이 적을수록
더욱 휑한 실내등도 꺼버렸다
현판을 내리고 종각에서 종을 떼어낸 뒤
덕지덕지 그을음이며 먼지
1톤 트럭에다 쓸어 담고
그 차에 아내를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낸 뒤
새 주인 올 때를 기다린다
어머니는 어째서 이 외진 산골에 기도원을 세웠을까
기도란 외로워서 바치는 구애(求愛)일까
열어젖힌 기도실이며 방마다
한때 펄펄 끓었던 소망들 흔적 없고
절절함조차 비운 마음들만 그림자처럼 기어 나와
함께 마루턱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라볼 것이 많을수록 등 뒤가 허전하리니
눈 아래 들판 비로소 아득해 보인다
어제까지 내 눈높이에 맞추던 이 풍경들
어느 시야에 들어 다시 출렁거릴 날들 기약하느냐

- 김명인,​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

​■ 이사 / 장철문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을 나선다
책과 책상을 꾸리고
옥상에서 내려온 장독 몇개를 받아서​

그 중에서 눈곱만큼 살림이 펴면서
헌옷만 입고 헌책만 보고
헌책상만 썼다고
눈물바람으로 사주신 책장과
옷가지도 있다​

테이프로 봉해진 사과박스 속에는
아버지의 필사본 『동국사기』와
할아버지의 생계를 달았던 저울도 있다​

어머니는 짐칸 난간을 붙들고
잘 살아라, 잘 살아라 하지만
당신은 곧 아들이 없는 방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 곁을 떠나서 몇 년,
몇 번의 이사에도
서른세 해 하루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가 들어나르고
어머니가 지은
한 채의 집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미끄러져 가듯이
당신도 당신의 한채의 집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 장철문, 『산벚나무의 저녁』 (창비, 2003)

​■ 겨울 이사​ / 송수권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통수를 유난히 쓰다듬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오지 않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는 의문을 제기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걷히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폐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봐라 또 누구는 겁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우 돕기 만 원을 빼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지게 써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홀짝
커피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을 따라가며
기죽기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하리라

- 송수권,​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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