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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호두' 고려시대 유청신이 들여와 고향 천안에 심어 (2021.10.23)

푸레택 2021. 10. 23. 11:05

[우리말] 호두, 고려시대 유청신이 들여와 고향 천안에 심어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30. 호두 胡桃


긴 설명이 필요 없이 호두나무의 열매를 호두라고 한다. 성질이 따스하여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는 이 호두는 호도胡桃가 변한 말이다. 처음에는 호도였던 것이 사람들이 호두로 더 많이 사용하면서 아예 굳어져버리자 정식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명물 호두과자’로 쓰는 경우는 잘못된 표기라기보다는 고유명사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여기에다 한자도 호도‘胡桃’를 그대로 쓰면서 호두와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앵두’나 ‘자두’의 경우도 원래 앵도櫻桃, 자도紫桃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현대국어에서 모음조화현상이 많이 깨진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15세기 중국어에서는 ‘호도’나 ‘자도’, ‘앵도’ 처럼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어울리는 것이 원칙이어서 그 현상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후대에 오면서 이러한 규칙은 점차 깨어져 갔고, 현대국어에 이르러서는 중세국어의 양성모음이 음성모음으로 바뀌고, 또 양성모음에도 음성모음이 어울리는 현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요즈음 우리가 ‘호두’하면 천안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호두과자가 천안의 명물로 등장하여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지만, 그 호두과자의 원료인 호두의 우리나라 시배지가 천안시 광덕면인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호두는 중국 한나라 장건이 서역에서 들여와 현재 중국의 각 지방 특히 화북지방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 호두가 일본에는 18세기경 한국에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호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 년전 고려 충렬왕(1290년) 12년에 유청신에 의해서다.

유청신은 고려 중기의 역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몽골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후에 여러 번 원나라에 내왕하는 동안 외교에 능했으므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대장군을 거쳐 동지밀직감찰이 되었다. 충선왕 때는 광정부사에 오르고 충렬왕 복위 후에는 첨의정승이 되었으며, 이어 고흥부원군에 피봉되고, 왕의 옥대를 하사 받았다.

그가 충렬왕 12년에 역관으로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호두나무 묘목 3그루와 종자 5개를 얻어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 봉화산에 심은 것이 이 땅에 호두나무를 심은 시초가 된다.

이 나무에서 열매가 열자 처음에는 이 열매의 이름을 알지 못해 호지胡地인 원나라에서 가져왔고, 과실의 모양이 복숭아처럼 생겨서 호지胡地의 호胡자와 복숭아의 도桃자를 따서 ‘호도’라고 불렀다.

광덕면에 있는 절 광덕사의 입구에는 처음 이 땅에 호두를 심은 유청신을 기리는 비가 하나 서 있는데, 그 비의 갓으로 호두를 조각해 얹은 것이 특이하다.

또한 그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00~500년 생의 호두나무가 서 있는데 유청신이 처음 들여온 묘목의 자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앵두와 자두가 처음에는 앵도櫻桃와 자도紫桃였던 것처럼 이 호두도 처음에는 호도胡桃였던 것이 사람들이 ‘도’ 발음보다는 ‘두’ 발음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아예 ‘두’ 발음으로 굳어져버리자 ‘앵두’, ‘자두’, ‘호두’가 모두 정식 표준어가 된 것이다.

한편 이 호두를 달리 ‘추자’라고도 부른다. 추자 열매가 마치 우리나라의 다래나무 열매를 닮았다 하여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추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당추자라 했다.

오늘날 외제를 국산과 구별하기 위해서 양복洋服, 양말洋襪, 양담배, 양주洋酒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양洋’자를 붙이듯이 과거에는 외래품에다 ‘당唐’자나 ‘호胡’자를 많이 붙여 국산과 구별했던 것인데 뒤에 ‘당’자가 없어지고 ‘추자’만 남아서 지금처럼 호두와 함께 추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글=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출처: 중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