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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설렁탕' 풍년농사를 기원한 임금님의 마음 (2021.10.23)

푸레택 2021. 10. 23. 10:54

[우리말] 설렁탕, 풍년농사를 기원한 임금님의 마음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28. 설렁탕

설렁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소의 머리나 족발, 무릎, 내장 따위를 푹 고와서 만든 국에다 밥을 말고 갖은 양념을 쳐서 먹는 음식을 말한다.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큰 길의 뒷골목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설렁탕집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설렁탕집은 아주 납작한 초가집이 많았는데 문 앞에는 쇠머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그 집이 바로 설렁탕집임을 나타내었다.

이 설렁탕의 명칭에 대한 내력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첫째는 고려조의 이야기다.

고려조 6대왕인 성종은 친히 논밭을 갈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의 진흥과 나라를 다스리는 요도를 위하여 홍문관, 존경각, 독서당을 설립하였으며, 대학이나 향학에는 논밭을 내리고 책들을 보내어 학문의 장려에 힘쓴 임금이다.

이렇게 선정을 베풀던 성종은 어느 날 친히 밭을 가는 친경행사를 위하여 동문 밖으로 대신들을 데리고 가서 친히 논을 갈고 모를 심으며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지라 비를 맞으며 환궁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신하들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형편인데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그날 오전의 행사만 하려던 것이 이렇게 늦어지니 준비된 음식이 없어 저녁마저 먹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다 못한 뭇 신하들은 즉석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아 큰 가마솥에 통째로 넣고 푹 고와서 한 그릇씩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시장한 판에 이런 곰탕을 먹었으니 꿀맛일 수 밖에…….

하지만 그때까지 이런 음식이 없었으니 이 음식의 이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성종은 즉석에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도록 한 바 신하들은 농사를 베푸는 곳에서 먹는 음식이란 뜻으로 베풀 선宣자와 농사 농農자, 끓을 탕湯자를 써서 선농탕宣農湯이라 이름을 지어 바침으로써 처음에는 ‘선농탕’이라 했는데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변음되어 ‘선렁탕’ 또는 ‘설렁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조선조의 이야기다.

조선왕조 때에 매년 음력 2월 일진이 첫 번째 신辛자가 든 날인 상신일上辛日이면 임금이 삼정승, 육판서와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선농단으로 나가게 된다.

거기서 생쌀과 생기장, 그리고 소와 돼지를 잡아 통째로 차려 놓고 그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뒤 그 아래에 있는 논에 내려가서 친히 논을 가는 친경행사로 쟁기를 세 번 민 뒤에 정승들도 따라서 쟁기를 밀었다.

이 행사가 끝나면 단을 관리하는 관원이 미리 준비해 둔 큰 솥가마에다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잘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서 썰어 놓았다. 이렇게 하여 놓은 다음 친경할 때 소를 몰던 노인들과 이를 구경하던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두 불러 이것을 먹었던 것이다.

원래는 임금이 계신 곳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선농단의 제사 때만은 농사의 본이 되는 농부들을 오게 하였고, 그날 선농단에는 농부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먹이기가 어려웠으므로 이웃 민가에서 많이 쓰는 뚝배기를 빌어다 밥을 담고 거기에 국을 퍼 담아주는데 김치가 따로 없이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없으므로 소금으로 간을 맞추었다.

이처럼 선농단에서 먹는 탕이라 하여 처음에는 선농탕先農湯이라 하던 것이 그 뒤 변음하여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글=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출처: 중도일보)

/2021.10.2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