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아비 / 정희성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 정희성,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 허수아비 / 유안진
장가 든 적도 없는데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이름까지 깨끗한 허수(虛手)라는 파다한 소문이다
취중에도 결코 실수한 적 없었지만
심중에는 간절히 바랐던 적 있었으니,
낳아야 자식인가 키워도 자식이지,
키워보면 안다, 기른 정의 바닥 모를 깊이를
나 같은 빈손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니
들길까지 마중 나와 기다리는
아비가 모르는 외아들을 둔
성 총각(聖總角)의 애타는 부정(父情)으로
겨울 들녘 풍경도 오히려 따스하다
- 유안진,『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 허수아비 / 조오현
새떼가 날아가도록 손 흔들어 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 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 조오현,『아득한 성자』(시학, 2007)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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