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정 고무신 / 안상학
- 권정생 선생님께
살아가기 막막한 날이면
선생님 집 섬돌을 생각합니다
죽고 싶은 날이면
섬돌 위에 놓인 검정 고무신을 생각합니다
질긴 인생을 함께 걸어온
그 고무신 한 켤레를 생각합니다
그래도 앞이 캄캄한 날이면
섬돌 옆 털이 북실한 두데기를 생각합니다
눈 오는 날 밤새도록 고무신을 품고 있는
그 강아지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문득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날이면
그 고무신을 훔치고 싶습니다. 도둑고양이처럼
밤늦게 조탑동 외딴집으로 스며들고 싶습니다. 눈 내려
도둑고양이 같은 내 발자국 묻힌 길을
고무신 발자국 남기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 안상학,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1999)
◇ 오르락내리락 / 노향림
- 김종삼金宗三
정릉 산동네 납작집에서
그는 평생토록 살았네
지붕 한쪽이 기울대로 기울어
말년까지 그가 유일하게 한 일은
바람에 지붕 날아가지 말라고
벽돌 한장 주워 점퍼 호주머니에 넣고 온 일이었네
그러고는 가난한 시인학교만 다니며
빈 파이프 문 채
한적한 산동네 길을 오르락내리락
눈 많이 내려도 따뜻하기만 한
머나먼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눈이 부시도록 햇살 맑은 날이면
마음 놓고 찰랑이는 햇살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접어 넣고는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오르락내리락했네
- 노향림, 『푸른 편지』 (창비, 2019)
◇ 李聖善 / 손택수
- 이성선의 시 「산양」을 읽고
산양이 산다는 설악산
산양 같은 시인이
이름 속에 성스런 羊 한 마리,
착하디착한 羊 한 마리를
키우고 살았다는 설악산
살아서는 미처 만나뵙지 못하고
무슨 놈의 눈이 이렇게나 오나
이렇게나 퍼붓나
저녁 연기 올라오는 내가평까지
발목이 푹푹 빠지는 내설악
산길을 내려오며 뒤돌아보면
거기, 당신의 뼈를 뿌렸다는
백담 계곡 너머
눈터럭 올올 흩날리는
봉우리에 초승달이
산양뿔처럼 뾰족이 돋아나고 있다
-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창비, 2003)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8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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