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고모부' 목성균 (2021.10.19)

푸레택 2021. 10. 19. 19:53

■ 고모부 / 목성균

  어느 해, 첫추위가 이는 날 해거름에 고모부가 오셨다.

  눈발이 산란하게 흩날리는 풍세 사나운 날이었다. 튀장 냄새 가득한 방안에 식구가 다 모여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우수수 울타리를 할퀴고 가는 매운 바람소리와 하등 상관없이, 단 구들과 새로 담은 화롯불의 온기로 방안은 그지없이 안락했다. 단란한 밥상머리의 조건은 진수성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튀장 냄새 한 가지만으로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는데 그 까닭은 식구 중 아무도 그 풍세 속에 나가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참 좋다."

  그렇게도 좋으신지 밥상머리에서 한숨처럼 조용히 토하시던 할머니의 감탄사다.

  그런 날 저녁때 고모부가 오셨다.

  뜰 위로 사람이 올라서는 기척이 나더니 "정 서방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벌컥 방문을 열어 젖히셨다. 뜰 위에 키가 껑충하게 큰 초로의 남자가 주루막을 지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나가서 맞아들였다. 그 분이 고모부였다. 내 기억에는 그 때 처음 고모부를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전에도 후에도 고모부를 뵌 기억이 없다.

  고모부는 지고 오신 주루막을 마루에 벗어 놓고 방안으로 들어 오셨다. 차가운 겨울 외풍이 고모부를 따라 들어와서 튀장 냄새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원래 침입자는 무례한 법이라지만, 방안의 단란을 풍비박산 내고 들어선 고모부가 내게는 퍽 무례할 뿐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는 반색을 하셨다.

  고모부가 할머니께 큰절을 했다. 할머니가 내게 절하라고 이르셨다. 나는 절을 했다.

  "그새 많이 자랐구나!"

  고모부가 내 절을 받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고 보면 전에 고모부와 나는 면식이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무심하게 뵈었든 모양이다.

  "마누라가 있나, 장성한 자식이 있나 어찌 환갑을 해 먹었노!"
하시며 할머니가 우셨다. 그 울음은 요절한 딸 생각과 홀아비 사위의 환갑 잔치의 연민 등 만감이 교차하는 울음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사위 앞에서 웬 청승이냐고 윽박지르셨다.

  "잘해 먹었습니다."

  고모부가 대답하셨다.

  "잘해 먹었다니 다행일세-."

  할머니는 고모부에게 두루마기를 벗으라고 하셨다. 고모부가 두루마기를 벗자 할머니는 두구마기를 둘둘 말아서 어머니께 밀어 놓으며 빨라고 이르셨다. 고모부가 환갑 때 입은 두루마기라며 아직 빨 때가 안 되었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할머니는 동정이 까만데 무슨 소리냐며 굳이 빨도록 이르셨다. 고모부는 두구마기를 빨아서 새로 꾸미는 며칠 간을 머무르셨다. 짐작건대 할머니가 고모부의 두구마기를 빨게 하신 것은 고모부를 며칠 간 잡아 두시려는 심산이셨던 것 같다.

  고모부가 어머니께 주루막에 술과 안주가 있으니 상을 보아달라고 하셨다. 고모부 말씀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셨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툇마루는 한겨울이었다. 고모부가 지고 오신 주루막을 열자 안에는 한지로 공손하게 싼 돼지 다리 하나와 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돼지 다리는 앞다리인지 퍽 작았다. "아이고. 돼지 다리가 작기도 하다. 미처 크지도 않은 돼지를 잡았는가 보다." 어머니가 한지를 풀어 헤치고 하신 소리가 지금도 귀에 남아 있다. "원-, 하얗기도-. 새로 뜬 문종인가 보네" 하시며 비단 피륙인 양 애착의 손길로 한지 바닥을 만져 보셨다. 한지 복판은 기름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으나 네 귀퉁이는 새벽 눈밭처럼 하얗다. 술은 용수 질러 든 맑은 술이었을 것이다.

  "불쌍한 고모부-."

  어머니가 말씀하셧다. 당시 나는 고모부가 왜 불쌍하다는 것인지 몰랐다. 자라면서 어머니의 말씀이 새는 날처럼 뿌옇게 밝아져서 지금은 나도 고모부가 생각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그 때는 몰랐다.

  고모부는 고모가 돌아가시고 새 장가를 들었는데 움고모가 가버리고 홀로 환갑을 맞으셨다. 내 고종 사촌 누이는 과년이었고, 고종 사촌 남동생은 어렸다. 그런 처지에서 고모부는 환갑 잔치를 하신 것이다. 환갑 잔치란 부모가 벌어 놓은 재산을 가지고 자식이 낯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당신의 환갑 잔치를 당신이 주선해서 치른 고모부는 얼마나 심정이 서글펐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장모님께 환갑 잔치한 인사를 드리러 오신 것이다.

  나의 고모부에 대한 기억은 그 때 뿐이다. 그 전에도 후에도 뵌 기억이 없다. 그 전에는 어렸으니까 기억에 없다 치더라도 그 후에는 뵌 기억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없다. 고모부는 환갑 잔치를 하고 얼마 안 되어 돌아기신 듯하다.

가끔 겨울 저녁 바람에 두루마기 자락을 흩날리며 길을 가는 사람의 먼 모습을 보면 고모부 생각이 난다. 고모부가 가지고 온 작은 돼지다리가 생각나 나를 슬프게 한다. 나도 훗날 동네 환갑 잔칫집 과방 일을 보아서 알지만 돼지 다리 하나를 남기려면 잔칫집 안주인이 여간 굳세게 버티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궁핍한 시대 아닌가. 소를 잡아서 잔치를 해도 먹새를 당해 내지 못할 만지 궁핍한 때, 다 자라지도 못한 돼지를 잡아서 잔치 손님 입에 돼지 기름칠이나 햇을 것인가. 잔칫집 안주인은 먼데서 오신 일가친척 손님들이 돌아가실 때 봉송할 걱정에 돼지 다리를 하나쯤은 빼돌려 놓게 마련이다. 과방에서는 조치개 접시에 담을 돼지고기가 떨어지면 그걸 노린다. 그래서 과방장이와 잔칫집 안주인은 잔치 막판에 돼지다리 때문에 일수 잘 싸운다.

  그건 잔칫집 안주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바깥주인은 그러지못한다. 그런데 고모부는 어떻게 그 작은 돼지 다리를 끝까지 지켜 가지고 장모님게 갖다 드렸을까, 생각하면 고적한 홀아비의 환갑 잔치가 얼마나 슬픈 피치 못할 통과 의례였을 지 짐작되는 바있어서 어머니처럼 '불쌍한 고모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서 방 밖의 눈보라치는 소리를 듣는 행복감을 작고 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죄 된다. 기실 삶의 각고가 누적된 후에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북하면 과묵하신 할머니가 '참 좋다'고 한숨처럼 감탄을 하셨을까.

  지금도 나는 겨울날 따뜻한 방안에 앉아서 방 밖의 사나운 풍세 소리를 들으면 고모부를 생각한다. 눈밭같이 흰 한지에 작은 돼지다리를 부모 시신을 염습하듯 소중하게 싸서 주루막에 담아서 지고, 호말 떼 달리듯 하는 풍세 속으로 고개를 넘고 강벼루를 돌아 장모를 뵈러 오신 사람의 도리가 나를 숙연하게 한다.

글=목성균 수필가

목성균(睦誠均) 은 1938년 충북 괴산군 연풍에서 태어나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중퇴했다. 1968년 산림직 국가공무원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25년 간 공직생활을 했다. 1993년 퇴직 후 「월간 에세이」에 초회 추천된 뒤, 1995년 월간 「수필문학」에 「속리산기」로 추천 완료됐다. 2003년 수필집 『명태에 관한 추억』이 문예진흥원 우수문학 작품집에 선정되었고, 2004년 3월 제22회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5월 타계했다. 저서로 『명태에 관한 추억』(2003), 『생명』(2004), 선집으로 『행복한 고구마』(2010), 『돼지불알』(현대수필가 100인선, 2010) 등이 있다.

/ 2021.10.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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