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비 / 신경림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 가을비 낙숫물 / 문태준
흥천사 서선실(西禪室) 층계에
앉아 듣는
가을비 낙숫물 소리
밥 짓는 공양주 보살이
허드렛물로 쓰려고
처마 아래 놓아둔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
숨어 사는 단조로운 쓸쓸한
이 소리가 좋아
텅 빈 양동이처럼 앉아 있으니
컴컴해질 때까지 앉아 있으니
흉곽에 낙숫물이 가득 고여
이제는 나도
허드렛물로 쓰일
한 양동이 가을비 낙숫물
-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
■ 가을비 / 김남극
늦가을 비가 오고 추위가 거미처럼 천장에 매달리면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려
바닥을 지나는 소리를 듣는다
물소리는 말라가고
그 속에 어떤 울음도 그쳐가고
내가 버린 슬픔도 차츰 멀어져 가는데
그 소리 속에 자꾸 내 몸도 마음도 들어가서는
최대한 몸을 말아 넣고
구부러진 곡선만큼 세상을 껴안아 보려고
손아귀에 힘을 줘 보는데
자꾸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저 슬픔들
멀리 혼자서 꺼이꺼이 우는 저 슬픔들을
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니
서늘한 이 늦가을의 빗소리는
자주 꿈속까지 그 영역을 넓혀오고
난 또 몸을 더 둥글게 말고 엎드려
그 소리를 밤새 듣는다
- 김남극, 『너무 멀리 왔다』 (실천문학사, 2016)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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