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개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는 손톱 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燈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一生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 《문학동네》 1998 가을
◇ 가을이 왔다 / 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 오규원,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
◇ 코스모스 학교길 / 유안진
도시 아이들은 별 볼 일이 적어서
별 볼 일이 많은 아이들을 찾아서
유성(流星)들은 밤마다 시골로 모인다
아이들이 개울물에 다이빙하듯
별들도 다투어 시골로 다이빙한다
아무도 모른다. 밤 하늘에서 다이빙한 유성들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놀다가 올라가지 못한 줄을, 그래서 아이들 목소리 자욱한 학교길도 코스모스꽃 자욱이 피는 줄을, 별눈 반짝이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교실 밖 꽃밭에서 까치발 돋우어 공부도 같이 하고, 철봉대 뒤켠에서 손뼉도 치는 줄을,
밤마다 유성이 모이는 시골도 학교길에
별 볼 일 많은 아이들은 모두가 코스모스꽃이다
그래서 학교길 가을볕은 한 촉수 더 밝다
아이들 목소리도 한 옥타브 더 높다.
- 유안진,『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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