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구절초' 박용래, '구절초 꽃술' 이은봉, '꽃 한 송이' 백무산 (2021.10.13)

푸레택 2021. 10. 13. 19:30

■ 구절초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박용래, 《일락서산에 개구리 울음》 (시인생각, 2013)

■ 구절초 꽃술 / 이은봉

구절초 꽃술 속으로 스며들고 싶을 때 있다 한 마리 꿀벌로 놀고 싶을 때 있다
중학교 때 냇둑길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모자 깃에 예쁘게 꽂기도 했던 꽃
구절초 꽃술 속으로 눕고 싶을 때 있다 꽃향기에 취해 깊이 잠들고 싶을 때 있다
구절초 꽃술을 언제나 마음 열어주는 것 아니다 어디서나 옷고름 풀어주는 것 아니다
단단히 여미고 있는 젖가슴, 더욱 단단히 여미고 있는 제석산 산자락, 구절초 꽃술들 보아라
구절초 꽃술 속으로 마냥 뒹굴고 싶을 때 있다 뒹굴며 한세상 잊고 싶을 때 있다
꽃술이 되고, 꽃자루가 되고, 꽃받침이 되어 한바탕 꽃향기로 흩날리고 싶을 때 있다.

-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3)

■ 꽃 한 송이 / 백무산

길이 끝나는 길에 나는 앉아 있었네
나도 끝이 나서 할 일을 잃었네
둑은 터지고 마을은 물 아래 있었네
사람길 다 끊겨 적막한 밤에
끊긴 길 위에서 밤을 지새네
나와 오래 한몸이던 이 길이
이 밤 이리도 낯서네

이대로 이 적막 위로 동이 트는데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날 쳐다보는 듯
자꾸 귓불이 가려웠는데
낮은 길섶 안개 속에 구절초 한 송이
옅은 햇살에 뽀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네
저리도 따스웁게 날 보고 웃는 꽃 한 송이 아,
저 꽃 한 송이가 나를 일으키네

​아하, 언젠가 우리 어디선가 어디에선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내 곁에서
눈을 반짝이며 말없이 오래 머물다 간 사람
이렇게 다시 만나네
금생에 이렇게 다시 만나네

​- 백무산, 《길 밖의 길》 (도서출판 갈무리, 2004)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