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 오탁번
감나무에서 감잎 뚝뚝 떨어지는 소리
아버지의 두루마기 소매자락에 이는
기러기 날아오는 가을 하늘 더 푸르다
텅 빈 들녘 송장메뚜기 한 마리
간고등어 한 손 든 아버지의 흰고무신코
살진 집짐승 여물 먹는 소리가 정겹다
버들치 헤엄치는 여울목에 빠진 가을달
반짇고리에 놓여있는 은반지의 흰 입술
쥐오줌 자국 난 벽에서 잠자는 씨옥수수
어머니의 가을 옷섶 따스한 저녁연기
호랑나비인 양 가벼운 굴뚝새 한 마리
감잎 뚝뚝 떨어지는 가을이 마냥 깊다
- 오탁번,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1999)
◇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정일근,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와시학사, 2001)
◇ 가을 거울 / 김광규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7)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4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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