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시월에' 문태준, '시월에' 윤은경, '시월' 나희덕 (2021.10.14)

푸레택 2021. 10. 14. 10:01

◇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문태준,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 시월에 / 윤은경

지도에서 무너진 절터만 짚어가는 내 속에 다스리지 못한 짐승이 있나 보다 얕은 바람에도 반짝 곤두서는 터럭과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약한 심장엔 험하고 오랜 시간의 쓴물이 배여 있나 보다

나는 아직도 사람이 그립고, 견디지 못해 길나선 바깥엔 가을 가뭄이 깊고도 깊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산비탈 풀숲, 한 모금 이슬로 입술 적시고 서둘러 제 목을 치는 풀꽃들이 보인다

보내고 떠난 자리, 단 하나의 씨앗을 위해 시든 꽃대궁, 실낱같이 흘렀을 고지랑물소리 천둥처럼 가슴 복판을 금긋고 지나는데,
꽃 피는 일순瞬과 꽃 지는 일순瞬 사이 방심하여 놓쳐버린 그대의 손

내 목마름은 또 그대가 밀어놓은 긴 통증, 무너진 절터를 찾아 서성거리다 돌산 무더기, 무더기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데

- 윤은경,『검은 꽃밭』(애지, 2008)

◇ 시월 /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나희덕,『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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