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 읽어주는 남자] '그리운 명륜여인숙' 오민석 (2021.09.28)

푸레택 2021. 9. 28. 13:52

■ 그리운 명륜여인숙 / 오민석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이십 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2015)

[감상]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에 그 유명한 ‘프루스트 효과’ 혹은 ‘마들렌 효과’라 일컬어지는 사건이 묘사된다.

고모가 건네준 홍차에 적신 프티트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맛본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 고향 콩브레의 모든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회상한다. ‘프루스트 효과’는 특정 냄새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좀 더 면밀히 살피면 냄새로 과거의 ‘장소’를 떠올린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모든 기억은 장소와 연결돼 있다. 장소와 맺어지지 않는 기억은 불투명하고 애매하다.

오민석 시인의 시 〈그리운 명륜여인숙〉은 읽는 순간 ‘아!’라는 탄성을 낮게 터뜨렸다. 시인의 경험과는 결이 다르지만 ‘명륜여인숙’이라는 장소가 환기하는 청춘의 굴곡진 추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불면의 밤에 떠올린 ‘명륜여인숙’은 젊음의 방황과 사랑의 체취가 짙게 서린 낭만의 장소로 드러난다. 아마도 명륜동 어딘 가에 있었을 그 여인숙은 ‘만취의 이십대’가 기성세대와 현실의 질곡을 향해 던지는 객기와 반항과 진지함이 소용돌이치는 질풍노도의 뜨거운 장소였을 것이다. 술에 취해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하고,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다 잠이 들기도 했던 젊은 날의 그곳. 문학과 철학과 사랑을 논하며 우리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서투르고도 진지한 미래의 다짐을 결의하던 여관방에 별처럼 빛나던 30촉짜리 알전구와 눈발을 맞으며 ‘집 아닌 집’을 찾아 하나 둘 떠나는 그들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새벽 종소리. 시인은 그런 젊은 날의 풍경을 ‘푸른 정거장’의 아련함으로 기억한다. 시인이 ‘명륜여인숙’을 그리워하는 것은 낭만의 행적이 사라졌다는 회한 때문일 테다.

도서관이 시험 준비를 하는 장소가 되고, 학교가 무한경쟁의 장소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은 위급해 보인다. 모든 장소가 취업과 자기계발의 실용적 장소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과 낭만의 장소는 오래전에 우리 기억 속에서 강제철거된 것 같다. 그래서 오민석 시인의 시 〈그리운 명륜여인숙〉이 더 애틋하게 읽혀진다.

글=신종호 시인

/ 2021.09.28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