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 김종삼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 《김종삼 전집》 (청하, 1988)
[감상]
우리 삶의 계단은 엄마의 아픈 시간
삶은 슬픔의 표정을 밟고 서있는 시간이다. 괴로움이 없는 삶은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허망하다. ‘아프다.’라는 단독의 문장에는 생기와 밀도가 없다. 슬픔의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아프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삶이 된다. 서술어들의 세계가 아무리 광대무변해도 하나의 주어가 갖는 삶의 밀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언어는 삶의 풍경을 드러내는 매개다. 삶의 풍경은 주체와 그 주체의 감정을 드러내는 서술어들의 관계맺음으로 일렁이고 요동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다. 삶의 팔할이 슬픈 일들로 넘쳐 흔들거려도 내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응전력은 바로 ‘나’라는 실존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런 생각의 실타래를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간명한 명제로 요약한 철학자가 바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다. 나는 그의 말을 나름 명심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슴 한켠에 허전한 느낌이 늘 이물처럼 남아있었다. 그러한 공허감의 뒤편에는 ‘나’를 있게 한 근본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앉아 있었다.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그 질문의 답은 간단하고도 자명하다. ‘나’를 여기에 있게 만든 것은 ‘엄마’다.
엄마는 세계의 씨앗이고, 생명이고, 사랑이다. 엄마는 삶의 배경이고, 자식은 그 배경에 드리운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아버지’의 역할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유치하다. ‘엄마’라는 표현 안에는 이미 ‘아버지’가 살고 있다.
엄마와 자식의 원초적 유대감에는 세속의 그 어떤 밀착과도 비견할 수 없는 신비가 살아있다. 그 신비함을 우리는 기껏해야 엄마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안타깝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종삼 시인은 엄마들의 불가해한 사랑의 실체를 ‘죽지 않는 계단’으로 비유한다. 놀라운 표현이다. 가슴이 먹먹하고 끝도 없이 아련해진다.
아침에 라면을 먹일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은 한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것이다.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행상’이지만 장사를 해야 하는 굳건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저물어 가는 산허리’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배고픈 자식들 때문이다. 장사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엄마가 ‘내일은 꼭’이라는 다짐으로 ‘먹을거랑 입을거랑’을 구해오겠다고 말하는 저 위대한 사랑의 실체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엄마들은 자식 앞에서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불사의 존재들이다. 죽지 않는 계단이다. 아니 죽을 수 없는 영원한 계단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삶의 계단에는 늘 엄마의 아픈 시간이 있다. ‘나(자식)’라는 허약한 실존은 그 희생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엄마들의 희망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주어는 엄마일 것이며, 우리는 그녀들의 애틋한 서술어들이다.
글= 신종호 시인
/ 2021.09.2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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