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자루 / 정호승
겨울 산사
마당에 쌓인
눈을 다 쓸고 나서
해우소 가는 길 옆
소나무에 기대어
부처님처럼 고요하다
오목눈이 동고비 직박구리
멀리 눈밭을 날아와
뭘 먹을 게 있다고
몽당빗자루를 쪼아대다가
빗자루 옆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하다
-《당신을 찾아서》(창비, 2020)
[감상]
삶의 짐을 내려놨을 때 찾아오는 여유
마음이 답답하거나 불안할 때 나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책』을 꺼내 읽는다. 옛 선비들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산가지로 주역의 괘를 풀어 그날의 길흉을 점치고 언행에 조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나도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책 속의 문장에 집중한다. 그렇게 하면 거짓말처럼 그 페이지의 어느 한 문장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현대인들에게 불안과 답답함은 일시적 감정이 아닐 것이다. 늘상 지고 있어야만 하는 마음의 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짐벗기의 몸부림으로 『불안의 책』을 자주 펼쳐 읽게 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문장이 “노동은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스스로 활기를 띤다. 더 이상 일하지 말자. 우리에게 선고된 의무는 잠시 보류하자.”는 것이다. 이 문장의 방점은 일하지 말자는 것에 있기보다 의무를 잠시 ‘보류’하자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다 짊어질 수 없는 의무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보라는 것일진대, 그것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용기 있게 취해보라는 권고일 것이다.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한적함을 만끽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궁여지책이랄 수도 있겠지만, 떠나지 못해 답답함이 몰려올 때 하던 일 멈추고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는 것이 마음 전환에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우연치 않게 읽게 된 정호승 시인의 시 ?빗자루?는 떠나지 않고도 떠남의 풍요와 한적함을 물씬 느끼게 해줘 참 기뻤다. 시 ?빗자루?는 해석이 별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눈 쌓인 산사의 고요한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 안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평안해 진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보면 눈을 쓰는 어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빗자루’가 주인공이 되어 산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쌓인 눈 다 쓸고 소나무에 기대 서있는 산사의 빗자루의 여유는 법당 안에 있는 부처님의 미소보다 더 여유롭게 보이기도 한다. 오목눈이 동고비 직박구리가 날아와 여기저기를 쪼아대도 의젓이 소나무에 기대 서있는 겨울 산사의 빗자루에서 감지되는 넉넉한 고요와 평안. 짹짹이던 새들도 그 고요함에 깃들어 눈 감고 휴식을 취하게 만드는 빗자루의 이미지로부터 마음 치유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게 삶의 필연이라면, 그 짐 잠시 내려놓고 쉬엄쉬엄 놀다 가는 일탈의 자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소나무에 기대어 있는 겨울 산사의 빗자루처럼 현실의 의무를 잠시 보류하고 자신만의 고요와 평안을 찾아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보자.
글=신종호 시인
/ 2021.09.2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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