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 읽어주는 남자] '그 여름의 끝' 이성복 (2021.09.27)

푸레택 2021. 9. 27. 10:55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감상]

꽃이 피고 지듯… 실패한 사랑은 또다른 시작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가면 600년 된 목백일홍을 만나볼 수 있다. 짙은 분홍색에 보라색 기운도 군데군데 서려 있는 목백일홍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꽃빛깔로 보는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무래도 꽃과 사람의 심장은 한통속인 듯하다. 특히 붉은 꽃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꽃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아득해진다. 꽃을 만나는 심사(心思)란 어떤 기억과의 내밀한 조우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이며, 경험의 ‘끝’에 매달려 있다. ‘끝’은 참담과 설렘의 두 감정이 맞부딪치는 경계의 시간이다. 꽃 지는 올해의 사연은 참담하지만 꽃 피는 내년의 사연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오죽헌의 목백일홍은 그런 까닭으로 600년을 훌쩍 건너왔다. ‘꽃’과 ‘심장’, ‘기억’과 ‘끝’, ‘참담’과 ‘설렘’의 두 지점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사연은 단연 사랑일 것이다.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은 폭풍의 시련을 뚫고 꽃을 피운 ‘나무 백일홍’의 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에 빗대어 자신의 심사를 고백한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라는 처음의 진술과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끝의 진술 사이에는 ‘폭풍’과 ‘우박’과 ‘불’과 ‘피’의 뜨거운 사연이 맹렬히 요동치고 있다. 이 요동은 사랑의 몸부림일 것이다. “넘어지면서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격정의 붉은 시간이 사랑의 얼굴이고 빛깔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 된다. 절망이 없는 사랑은 가볍고 얕다. 한편 절망이 ‘끝’이 되는 사랑은 참담하다. 사랑의 실패는 사랑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아프게 느껴지면서도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을 기대하게 한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逆說)일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올해의 꽃이 지고 내년의 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되는, 그래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장난 같은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어떻게’ 했는가라는 태도일 것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열정이다. 이성복 시인은 그 열정을 ‘붉음’의 빛깔로 표현한다. 그 안에는 절망과 희망이 살고 있다. “물질 속은 붉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이 기억한다. 낙원에 다가서는 일은 여전히 우리를 붉게 만든다”는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말처럼 사랑의 낙원에 다가서는 일은 심장을 꽃처럼 붉게 만드는 여전한 ‘끝’의 ‘시작’이다.

글=신종호 시인

/2021.09.2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