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 읽어주는 남자] '흰색 가면' 박지웅 (2021.09.24)

푸레택 2021. 9. 24. 19:41

■ 흰색 가면 / 박지웅

어수룩한 개는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쥐약과 건넛산에 놓인 달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달이 어렴풋이 뒤뜰에 지면 홀린 듯 달려갔다
키우던 개와 닭은 주로 화단에 묻혔다가
이듬해 유월 머리가 여럿 달린 수국이 되었다
둥그스름한 수국 머리를 쓰다듬으면
묶인 새끼들이 먼저 알아보고 낑낑댔다
한동안 흙과 물과 바람과 섞여
백수국은 낯가림 없이 옛집 마당을 지켰다
닭이 다 자라면 날개를 꺾어 안고 시장에 갔다
닭장수는 모가지를 젖혀 칼집만 스윽 냈다
닭이 던져진 고무통 속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다
피가 다 빠진 뒤에야 잠잠해지는 짐승의 안쪽
잠자리에 들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핏발선 꽃들, 힘세고 오래가던 어지럼들
닭 뼈다귀를 화단에 던져주면
수국은 혈육처럼 그러안고 밤새 핥는 것이었다

-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감상]

삶과 죽음의 현기증

신화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황금가지》는 ‘공감주술(共感呪術)’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신화와 종교를 분석하는데, 그 개념의 요체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비밀스러운 공감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파동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해지며 공간을 초월해 상호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주술(呪術)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비밀스럽고 두려운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세계의 파동을 느끼고 읽어내 현시하는 게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영매(靈媒)라 정의할 수 있다. 영매로서의 시인은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의 간극에 다리를 놓아 삶의 안쪽에 고립된 어지럼증과 불안을 정화(淨化)하는 역할을 한다.

박지웅 시인의 시 '흰색 가면'은 개와 닭의 죽음과 화단에 핀 수국의 대조를 통해 삶과 죽음의 현기증을 제시함으로써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불안의 세계를 독자들 앞에 불쑥 내민다. 쥐약을 먹고 죽은 개와 모가지에 칼집이 나 죽은 닭은 유년의 화자가 실감한 최초의 공포였을 것이다. 목에 칼집이 난 채로 고무통 속에 던져져 “둥둥 북소리”를 내다 피가 다 빠져서야 잠잠해지는 고요, 그것이 유년의 화자가 목도한 “짐승의 안쪽”이고, 죽음의 실체다. 공포스러운 사태는 닭의 죽음이 아니다. 그 닭을 잡아먹음으로써 유지되는 인간의 삶이다. 여기에 삶과 죽음의 어지럼증이 있다. 시인은 죽은 개와 닭이 수국이 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어지럼증을 견딘다. 수국을 보고 낑낑대는 강아지들과 닭 뼈다귀를 혈육처럼 핥는 수국을 보며 시인은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비밀스럽고 두려운 텔레파시(telepathy)를 읽어낸다. 삶의 가면은 죽음이고, 죽음의 가면은 삶이라는 공감의 내밀한 순환을 이해할 때 불안은 정화된다.

글=신종호 시인

/ 2021.09.2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