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쾌한 유랑 / 이재무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 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 《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사, 2011)
[감상]
통통통, 삶을 횡단하는 눈부신 리듬
도시의 삶은 목적 달성이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낙오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급한 일이 없어도 급한 것처럼 뛰어다니는 게 도시인들의 모습이다. 목적이라는 긴급한 명령 앞에서 ‘산책’이나 ‘소요’(逍遙)나 ‘유랑’이라는 말을 운운하는 것은 생활의 절박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처사로 취급되는 게 요즘의 세태다. 목적은 과정의 연속이지 꼭 이뤄야 할 절대 과업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목적이 없을 때 목적은 분명해진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산책과 소요의 가벼운 삶이 목적의 짐을 지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시의 무거운 삶보다 더 많은 성취와 풍요를 제공한다는 것은 내심(內心)으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터놓고 말하는 이들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산책하는 자들이다. 무거움 속에서 경쾌함을, 고됨 속에서 발랄함을 찾아내는 발견자들이다. 이재무 시인의 시 「경쾌한 유랑」은 생업과 살림과 노동에 묻어 있는 힘겨움과 피곤함의 중력(重力)을 맨땅을 통통통 튀며 경쾌하게 새벽 거리를 횡단하는 참새들의 날렵한 동작을 통해 상쇄함으로써 어질고 환한 삶의 리듬을 발견해 낸다. 노동의 중력을 한 음절씩 끊어내며 스타카토로 연주되는 삶의 경쾌함이란 독수리의 비상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움직임은 아니다. 거대한 것, 이를테면 떼 지어 다니거나 대오를 짓는 행동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 진실은 가볍고 작다. 노동이 놀이가 된다는 것은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가볍고 날렵하고 수다스러운 참새들의 몸놀림처럼 약간씩만 튀어 오르는 탄력성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통통. 그렇게 작은 움직임과 리듬으로 세계의 무거움을 가볍게 횡단하는 행보가 시인이 말하는 눈부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자유를 위한 비상은 커다란 날개보다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들것’ 하나면 충분하다.
걷는 사람은 뛰는 사람보다 많은 걸 본다. 걷되, 목적 없이 천천히 걷는 산책자는 더 많은 걸 본다. 본다는 것은 발견한다는 것이고, 발견한다는 것은 가벼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좋은 삶이란 곧 ‘경쾌한 유랑’이다.
글=신종호 시인
/ 2021.09.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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