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힘 / 박승민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 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삼년 내내 풍으로 앓아 누운 주영광씨, 저녁나절 번쩍 눈떠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사과밭에 물!” 한마디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 한마디 결구를 맺느라 혼자서 무던히도 아프고 눈감지 못했던 것이다
-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2020)
[감상]
해가 떠서 지는 하루의 시간은 사람이 태어나 죽는 일생에 비유되곤 한다. 정오의 태양을 청춘에, 저물녘의 태양을 노년에 빗대는 것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순리에 기반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삶은 참 덧없고 짧다. 일몰 직전 잠시 하늘이 밝아지는 순간을 일러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나아가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기운이 돌아오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항시 유념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죽음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박승민 시인의 시 「마지막 힘」을 읽으면서 회광반조와 메멘토 모리의 뜻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하다. 서리 내린 빈 고구마 밭과 늙고 썩어 힘겹게 서 있는 사과나무의 모습은 황혼녘의 풍경처럼 쓸쓸하다. 그런데 다 썩은 사과나무에 뜻하지 않게 ‘활짝’ 사과 꽃이 피었다 하니, 말 그대로 회광반조의 풍경이다. 사과나무는 왜 꽃을 피웠을까? 사과나무의 꽃핌이란 이 시를 읽는 이들의 삶이 다양한 것처럼 여러 방향의 의미로 반조될 것이다. 여하튼, 사과나무의 꽃핌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려는 안간힘으로 여겨지는데, 시인은 그 속내를 삼 년 내내 풍을 앓아 누운 주영광씨의 모질고 긴 사연을 통해 드러낸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눈을 번쩍 뜨고 “사과 밭에 물!”이라고 외치는데, 이 간결한 외침에 담긴 속뜻은 아주 깊어 보인다. 그 외침은 사과 밭에 물을 주는 행위를 넘어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먹이는 것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삶의 보편적 이치로까지 확장되어 읽힌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인간의 복잡한 오만은 삶을 추하게 만든다. “사과 밭에 물!”이라는 주영광씨의 마지막 결구는 단순해서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마디 결구를 맺기 위한 회광반조의 성찰과 매순간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의 자세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위태로울 것이다. 생명은 필멸이지만 그 필멸을 딛고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된다. “사과 밭에 물!”을 주는 것, 그것이 나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사랑이자 생명의 완결이라는 것이 박승민 시인이 말하려는 ‘마지막 힘’이 아닐까?
글=신종호 시인
/ 2021.09.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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