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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생물의신비] '호박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2021.09.15)

푸레택 2021. 9. 15. 08:10

■ 호박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흔하면 천대받고, 귀하면 대접받는 법. 흔히 못생긴 여자를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빈정대는데, 이는 요맘때가 되면 호박이 농촌 어디에서나 온통 샛노란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대니 하는 말이다. ‘호박이 궁글다’란 여문 호박은 속이 텅 비었듯 머릿속에 든 것이 없음을 비꼰 말이다. 아마도 바보, 미련퉁이란 뜻인 서양말 ‘호박 머리’(pumpkin head)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호박꽃 잎줄기는 까칠까칠한 센털이 가득하고, 덩굴의 단면은 오각형이다. 또 호박꽃 잎줄기는 덩굴손으로 잡아 오르고, 줄기 마디마다 하얀 곁뿌리를 낸다. 호박 꽃잎은 심장 꼴로 가장자리가 얕게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다.

호박은 참 쓸모가 많다. 꽃은 전 부쳐 먹고, 연한 이파리는 데쳐 쌈으로, 애호박은 전과 나물로 먹는다. 청둥호박은 엿이나 죽으로, 가을호박은 호박오가리(고지)로 갈무리했다가 나물로 해서 먹는다. 호박씨에는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E가, 늙은호박에는 식이섬유, 비타민A, 베타카로틴 등이 가득 들어있다. 그러기에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고 했던가.

필자가 해마다 겪는 일인데, 애호박은 호박이 열릴 때 그때그때 따먹으면 된서리가 내릴 때까지 성성하게 넝쿨을 뻗고 마디마다 잇따라 열매가 달린다. 그런데 따지 않아 누렇게 여문 늙은호박을 매단 줄기는 잎이 시들고 말라버린다. 어디 호박뿐인가. 벼의 경우, 이삭이 줄기 속에서 자라기에 씨를 맺을라치면 줄기는 곧 마르게 된다. 그러나 꽃대가 생길 때 뽑아버리기를 되풀이해도 꽃대는 몇 년이고 솟는다.

이렇게 호박이나 벼처럼 후손(씨)을 남기면 ‘내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생을 마감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기 살기로 자손을 남기려고 몸부림친다. 생물의 삶이란 오직 ‘생존과 번식’에 있는 것으로 종족보존의 비원(悲願)이 이렇게도 무섭다. 그래서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생기를 오래 유지하고, 늙음을 늦추는 비결이라는 것을 호박에서 배운다.

글=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출처] 세계일보 & Segye.com 2017.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