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끈질지게 살아난 풀이 약성도 강하다 / 고진하 목사 시인
[휴심정] 고진하목사의 불편당 일기]불편당 일기 22: 메꽃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유안진의 시 「들꽃 언덕에서」의 부분인데, 맑고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시다. 나는 들길을 걷다 아름다운 꽃을 만나도 함부로 꺾지 않는다. 그냥 꿀벌이나 나비처럼 코만 가져다 대고 흠흠 꽃향기를 음미할 뿐. 시인의 절창을 읊을 때마다 나는 평생 농부로 사셨던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곤 한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쓸데없이 꺾지 말아라! 어머니는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일자무식이었지만,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성스런 생명이라는 것을 당신의 온몸으로 알고 계셨으리라.
봄꽃들이 다 지고 여름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유월 초순, 친구 사진작가 K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불편당을 찾아왔다. 시원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나자 그는 들꽃을 보러 가자며 재촉했다.
“웬 들꽃? 자네는 그동안 주로 인물 사진을 찍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사람보다 야생에서 자라는 들꽃이 좋더라구.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저 홀로 핀 작은 들꽃들이!”
나는 곧 마을 둘레길로 친구를 안내했다. 둘레길은 논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경운기나 트랙터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정도의 좁은 농로. 여름 풀들이 무성한 논두렁에는 쑥, 쇠비름, 질경이, 쇠뜨기, 메꽃 등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둘레길 주변의 들꽃들을 살피던 친구는 논두렁에 막 피어난 메꽃을 보고 물었다.
“저 연분홍색 꽃은 뭐야! 꼭 나팔꽃처럼 생겼는데?”
“아니, 들꽃 사진을 찍었다며 저 꽃도 몰라? 생긴 건 나팔꽃과 비슷하긴 하지만 저 꽃은 메꽃이야.”
“자네가 알다시피 난 서울 토박이잖아. 그리고 들꽃에 마음 둔 게 환갑 지난 후이니 아직 들꽃 공부 초등생인 셈이지.”
강렬한 여름볕을 받아 무성하게 자란 녹색의 풀들 위로 줄기를 뻗어가며 연분홍 꽃을 피우는 메꽃. 멀리서 메꽃을 보고 있으면 시골 처녀의 수줍어하는 앳된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가 메꽃에 반해 카메라로 담는 동안 나는 메꽃의 생태에 대해 들려주었다. 메꽃은 여러해살이풀로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뿌리줄기로 종족을 퍼뜨리는데, 아무리 농부들이 예초기로 베어내고 제초제를 뿌려 없애려 해도 강인한 생명을 면면히 이어가는 풀이라는 것… 내가 하는 얘기를 들으며 논두렁에 앉아 메꽃을 사진에 담던 친구는 문득 자기가 일본 유학 시절에 들은 얘기라며 입을 열었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던 히로시마를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어. 그때 들은 얘기인데, 지금 여기도 돋아 있는 저 쇠뜨기 말이야. 이 풀이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됐던 히로시마에서 가장 먼저 새싹을 틔웠다고 하더라구!”
“첨 듣는 얘기인데, 참으로 놀랍구만.”
그러니까 종횡무진으로 뻗어가며 땅속 깊이깊이 뿌리박은 쇠뜨기는 그 무서운 방사능의 열선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녹지가 다시 살아나는 데 적어도 50년은 걸릴 거라고 했던 그 죽음의 땅 히로시마에 가장 먼저 새싹을 틔운 쇠뜨기를 보고 사람들은 얼마나 큰 용기와 삶의 희망을 얻었을까.
나는 친구의 얘기를 통해 메꽃과 쇠뜨기 같은 뿌리 깊은 식물들이 지구 생명의 희망을 이어간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친구가 들꽃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쪽삽으로 메꽃 뿌리를 캐서 비닐봉지에 담았다. 부드러운 메꽃 잎들과 꽃도 몇 송이 따 넣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친구는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오늘 메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라고 했다.
메꽃은 덩굴성 식물로,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에 자생해 왔다. 주로 들판과 밭에서 자라는 메꽃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 잘 모르는 이들은 꽃 모양이 비슷해서 나팔꽃의 일종인 것처럼 오해하는데, 나팔꽃은 재배 식물이지만 메꽃은 저절로 자라는 잡초. 식물도감을 보면 나팔꽃은 메꽃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사람이 씨앗을 뿌려 키우는 나팔꽃은 메꽃보다 생명력이 약하다. 나팔꽃은 여름이 지나면 시들어 죽어버리지만, 메꽃은 땅 위 부분은 시들어버리나 결코 죽는 일이 없다. 메꽃은 겨울 내내 땅속에 줄기를 묻고 있다가 이른 봄 땅속줄기에서 마디마디 줄기를 내려 새순을 돋게 한다. 메꽃은 아무리 땅 위의 부분을 잡아뽑거나 베어내도 씨를 말릴 수는 없다. 따라서 메꽃이 밭에 침입하면 성가신 잡초가 되기 때문에 농부들은 아주 싫어하는 풀이다.
요즘은 농부들이 트랙터로 땅갈이를 하는데, 그러면 메꽃은 뿌리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하지만 메꽃은 도리어 이걸 좋아하는 듯싶다. 트랙터가 뿌리줄기를 잘게잘게 절단해 버려도 메꽃은 절단된 모든 뿌리줄기로부터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꽃은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팔과 다리가 잘려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이나가키 히데히로, 『풀들의 전략』 참조)
메꽃은 6~8월에 엷은 분홍색 꽃이 피는데,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5~6㎝, 폭은 약 5㎝이다. 나팔꽃은 아침에만 피는 꽃인데, 메꽃은 낮에 핀다. 메꽃은 대개 햇빛이 나면 꽃잎을 활짝 열고, 해가 지면 오므리는 특성이 있다. 또 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기 때문에 여름 내내 볼 수 있다. 메꽃은 보통 열매를 맺지 않으나 결실하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것은 메꽃이 같은 그루의 꽃끼리는 수정하지 않고 다른 그루의 꽃끼리 수정해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꽃을 흔히 ‘고자화(鼓子花)’라고 한다.
그러나 메꽃은 씨로 번식하지 않고 주로 땅속줄기로 번식한다. 땅속줄기의 마디에서 발생한 줄기는 길이 50~100cm 정도의 덩굴로 땅 위를 배밀이하고 다니지만 다른 풀들에 파묻히는 일은 없다. 옆에 키 큰 풀들이 있으면 덩굴순을 뻗어 칭칭 감아 올라가며 자라기 때문이다. 생명력이 이토록 강한 식물이라 그럴까. 메꽃은 약성도 뛰어나다. 특히 메꽃 뿌리는 혈압을 낮추고 당뇨병의 혈당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 꽃 피기 전에 뿌리를 캐서 푹 쪄서 먹거나 날로 생즙을 내어 먹어도 된다. 여름철 무더위에 시달려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을 때 메꽃 뿌리로 생즙을 내어 먹으면 곧 몸에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메꽃의 뿌리와 잎에는 아프젤린, 트리폴린, 아스트라갈린, 사포닌, 루틴 등의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런 성분은 이뇨작용을 하여 소변을 잘 나가게 하고 변비에도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고 한다. 메꽃 뿌리는 ‘천연 비아그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성의 발기불능 증상이나 양기 부족, 여성의 불감증 등에 효험이 있다. 이런 증상에는 메꽃을 뿌리째 뽑아서 말려 잘게 썰어서 하루 20~30그램에 물 1.8리터를 붓고 물이 반이 되게 달여서 여러 차례에 나누어 마시면 된다. 메꽃 뿌리를 쪄서 말려 두고 자양강장 식품으로 활용해 보아도 좋을 듯싶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메꽃을 약으로 사용하였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엔 구황식물로도 썼다고 한다. 구황식물이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 대신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가리킨다. <조선의 구황식물과 식용법>에 따르면 메꽃의 구황적 식용법을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른 봄에 땅속으로 뻗어 있는 하얀 땅속줄기를 캐다가 소금을 쳐서 볶거나 찌거나 삶아서 먹는다. 땅 위의 줄기나 잎도 삶아 나물로 먹는다. 땅속줄기는 날것으로도 먹을 만하며 단맛이 난다. 뿌리를 가루로 내어 약간의 설탕을 곁들여서 콩가루같이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식용법으로는 땅속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잘게 토막 쳐서 잘 삶아 물에 우린 다음 쌀이나 보리 따위와 함께 섞어서 죽이나 밥을 지어 양식으로 대용할 수 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식용법의 도움을 받아 주로 메꽃 뿌리를 캐다가 씻어 쌀을 넣고 밥을 지어 먹는다. 그리고 뿌리를 씻어 그늘에서 잘 말려 두었다가 갈아서 경단을 만들기도 하고 쌀가루에 섞어 떡을 빚어 먹기도 한다.
마을 둘레길을 돌아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우리 집 셰프에게 산책 중에 캔 메꽃 뿌리를 건네주었다. 내가 건네준 비닐봉지를 받아든 셰프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메꽃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십 종의 야생초들이 즐비한 우리 집 마당에서 계속 풀꽃 사진을 찍던 친구는 메꽃으로 무슨 요리가 나올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한 시간쯤 뒤 셰프가 불러 거실로 들어가자 식탁 위에 메꽃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간단하게 메꽃밥을 지었어요. 작가 선생님은 미식가라고 들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미식가라는 말에 친구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밥상엔 돌나물 물김치와 달래를 썰어 넣고 만든 양념장이 놓여 있었다.
양념장을 넣어 썩썩 비빈 메꽃밥을 몇 숟가락 먹어본 친구가 말했다.
“메꽃이 들어가서 그런지 밥맛이 달큰하네요. 밥만 먹어도 맛있어요!”
셰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옛사람들은 구황식물로 먹었다지만, 우리는 메꽃밥을 별미로 가끔씩 먹어요.”
친구는 셰프가 떠준 밥을 게 눈 감추듯 비우더니 한 그릇 더 청했다. 밥을 더 담아주는 셰프의 얼굴은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메꽃밥 두 그릇을 비우고 난 친구가 포만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생전 처음 들풀로 만든 음식을 먹어 보았는데, 기분이 아주 상쾌하네요.”
셰프가 벙긋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 좀 많이 드신 듯싶지만, 들풀 요리는 과식을 해도 소화가 아주 잘 된답니다.”
그렇다. 언제 먹어도 들풀 요리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떤 진화 심리학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뇌와 몸과 마음은 여전히 수렵채집 시대의 생활에 적응해 있기 때문에 들에서 채집해온 들풀 요리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부엌과 다르지 않다.”
우리 부엌엔 절친인 서예가가 써준 ‘식야방’(食野房)이란 글귀가 붙어 있다. 풀어보자면 ‘들판을 통째로 가져다 요리해 먹는 주방’이란 뜻. 오늘 우리는 메꽃의 어린 잎과 꽃과 뿌리를 통째로 부엌으로 가져와 요리해 먹으며 희희낙락 즐겼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DNA는 여전히 야생의 들판을 누비는 걸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글=고진하 목사 시인
[출처] 한겨레 2021.05.18
/ 2021.09.11 옮겨 적음
'[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오길의생물의신비] '곤충계의 폭군 사마귀'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2021.09.13) (0) | 2021.09.13 |
---|---|
[권오길의생물의신비] '칡나무와 등나무에서 배우는 지혜'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2021.09.13) (0) | 2021.09.13 |
[김민철의 꽃이야기] '77세 작가는 99세 엄마를 어떤 꽃에 비유했을까' (2021.09.10) (0) | 2021.09.10 |
[김민철의 꽃이야기] '칡꽃에 대해 잘 모르는 세 가지' (2021.09.10) (0) | 2021.09.10 |
[김민철의 꽃이야기] 왕고들빼기, '야생초의 왕'인 이유 (2021.09.10) (0) | 2021.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