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천사의 나팔꽃 /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8:1-4 에베소서 2:8-10, 마태복음 11:28-30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마음 편히 이곳저곳을 다닐 수 없어 가까운 산을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과 답답함을 날려버릴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민한 눈을 가진 시인들의 눈에는 산행(山行)의 소박한 즐거움에도 대가가 따르는 게 보이나 봅니다. 이동순 시인의 을 읽으며 오늘의 말씀 시작합니다.
"내가 기운차게 /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 저녁밥을 기다리던 / 수백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 가던 / 작은 개미와 /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것들은 / 내 구두 발밑에서 죽어갔다 / 내가 기운차게 /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깊을 무너뜨려 /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 내가 기운차게 /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햇살에 반짝이던 /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 내가 기운차게 /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 이처럼 나도 모르게 저지른 불상사는 / 얼마나 많이도 있었나 / 생각해보면 한 가지의 즐거움이란 / 반드시 남의 고통을 디디고서 얻어내는 것 / 이것도 모르고 나는 산 위에 올라서 / 마냥 철없이 좋아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일어난 수많은 불상사(不祥事)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의 즐거움이란 반드시 남의 고통을 디디고서 얻어내는 것"이라는 통찰 앞에 마주 섭니다. "이것도 모르고... 산 위에 올라서 마냥 철없이 좋아하기만 했었던," 철부지와 같은 삶을 고백합니다. '철부지'란 '철', 즉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 곧 지혜를 '알지 못하는'[부지(不知)] 존재, 다시 말해 "사리를 분별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국어사전)와 같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어디 시인만 이런 철부지이겠습니까.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는 근래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능력/공로의 폭정' 쯤 되겠습니다. 우리말 부제는 "능력주의(meritocracy)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을 자신의 온전한 능력과 공로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샌델 교수는 능력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한 사람이 가진 신체적 우월함을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스포츠 분야에서 크게 성공합니다. 똑똑한 두뇌 역시 능력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두뇌를 사용해 명문 대학에 가고 고수익의 직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능력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신체적인 우월함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DNA일 수 있습니다. 후천적인 운동 능력은 본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사회가 원하는 인기 스포츠 종목의 선수가 되었기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된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농구 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만약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다면 단지 좁은 그물망 안에 공을 잘 던져넣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그렇게 큰 부와 명예를 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 호나우두나 메시가 만약 중세시대에 태어났다면 단지 드리블을 잘하고 공을 차서 정확한 지점에 떨어뜨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엄청난 인기와 부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수한 두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샌델 교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부의 세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아이비리그에 가기 위해서는 고액의 학비를 댈 수 있어야 하지만, 족집게 과외가 필수라고 합니다.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가고 싶어도 갈 확률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개천에서 태어난, 혹은 유색인종으로 태어난 이들이 높은 문턱을 넘을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문제는 성공한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100%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 것이라고 샌델 교수는 강조합니다. 덧붙여 그런 능력주의 사회의 폐해는 패배자 마인드라고 지적합니다. 승리자는 운이 좋았는데 그 오만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운이 없어 기회를 박탈당한 패배자는 스스로 자책합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오직 자신의 빼어난 능력 덕분이라 착각하면서 실패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연대와 공공선(公共善, common good)이 무너지는 것이 지금 미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비판합니다. 이게 어디 미국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신명기 8장에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그들에게 신신당부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배가 부르게 되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고 교만해질까 모세는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명기 8:2-4)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이 왜 고달프지 않고 고단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그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의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걱정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변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그러나]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명기 8:7-14) 모세는 교만을 경고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도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세 번째로, 이번에는 좀 더 강한 어조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합니다. 아니 경고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게 하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명기 8:14-19) 불길한 예감은 왜 그리 잘 맞는 걸까요. 그렇게 신신당부(申申當付)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우쭐대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다 패망하여 다시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이 일을 두고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탄식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목장에서 풀을 뜯어 배가 부르자, 우쭐대다가 이 백성은 나를 잊었다."(호세아 13:6, 공동번역)
하나님은 우쭐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악한 세상을 벌하고 악인들의 죄악을 벌하리라. 잘난 체하는 자들의 자랑을 꺾고 우쭐거리는 폭군들을 끌어내리리라"(이사야 13:11, 공동번역)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 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에스겔 28:2, 새번역) 경고하십니다. 신약의 서신들도 한결같이 인간의 교만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보서 4:16, 새번역)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로마서 11:18,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만이 홀로 존귀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의 사랑으로, 창조세계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관계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聖別)하였[다]"(예레미야 1:5)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뿌리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어머니의 탯줄의 고통입니다. 이해인 님은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에서 "어디에 계시든지 / 사랑으로 흘러 /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 푸른 어머니 // 제 앞길만 가리며 / 바삐 사는 자식들에게 /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 끝없는 용서로 / 우리를 감싸안은 어머니 // 당신의 고통 속에 생명을 받아 / 이만큼 자라온 날들을 /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오"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고마움을 모른다고 하지요. 사랑도 은혜도 보석도 그런 거 같습니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착각한다고도 하지요. 우리는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비와 나무들 때문에 숨을 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이웃의 '보이지 않는 손'의 수고로 소중한 일상을 유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나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자기도취에 빠집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은 『팡세 (Pensées)』에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팡세는 '생각'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의인(義人)이 있고, 또 하나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죄인(罪人)이 있다." 그가 말하는 '죄인'과 '의인'을 너무 교리적으로 듣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은혜에 빚진 자라는 것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있고 저 혼자 잘 났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다. 백영민 교수가 저와 함께 지은 책 『지구정원사 가치 사전』 (동연, 2021)에서 말하듯이, 오만(傲慢) 혹은 교만(驕慢, arrogance)은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이만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겸손(謙遜, humility)은 '내 것이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다'라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근대과학의 문을 연 영국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하나입니다. 비록 그의 고전 물리학이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깨졌으나 그는 당시 '외계인 같은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뉴턴은 그 기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그저 지금까지 과학의 명맥을 이어오며 헌신한 수많은 학자라는 거인들의 어깨를 잠시 빌려 올라타 조금 멀리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출중한 업적이 자기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 연구를 수행해온 수많은 학자의 공로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성취가 다른 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했습니다. 뉴턴의 진정한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고 말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의연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인격은 오직 겸손함에서만 나온다고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스스로 높다고 여기면 남들이 끌어 내리지만 스스로 낮다고 여기면 남들이 위로 밀어 올려준다(自上者 人下之 自下者 人上之)"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교만은 불신앙입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 즉 원죄(原罪)는 뱀의 유혹에 따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세기 3:7)보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교만의 죄였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 안에 사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 Ruether)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희생하며 자기 스스로 높이는 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이 코로나 역병과 기후 붕괴는 하나님의 조화로운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모든 생명을 희생하며 자기 스스로 높인 죄의 결과입니다. 이런 교만에 반대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오늘 읽은 신명기의 말씀에 의하면,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압제와 학대에서 해방해 광야 사십 년 동안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수고와 나의 노력보다 무언가 더 큰 것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서 어디에서도 능력주의(meritocracy)나 공로 사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은 얻는 자"(로마서 3:24)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디모데후서 1:9, 공동번역)이라고 했습니다. 성서는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로마서 5:17, 공동번역) 생명과 구원에 이르렀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공로]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로마서 11:6, 새번역 / "And if by grace, then it is no longer by works; if it were, grace would no longer be grace." - NIV) 이 은혜의 복음이 왜 종교 생활에만 적용되어야 합니까. 공중의 새도 친히 기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귀하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마태복음 6:25-31) 무한 탐욕과 경쟁, 오만과 경멸로 찢기고 무너진 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사의 나팔꽃'을 아시는지요. 이 꽃은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천사의 나팔꽃은 노랑, 빨강, 주황의 큰 꽃을 피우는데 5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까지도 핍니다. 주렁주렁 달린 크고 화려한 꽃잎이 꼭 천사가 나팔을 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영어로는 "Angel's Trumpet"이라고 합니다. 이 꽃의 특징은 하나같이 땅을 향하여 통꽃으로 핀다는 점입니다. 정말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의 천사들이 이 땅을 향해 사랑이 트럼펫을 불어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와 반대로 '악마의 나팔꽃'(Devil's Trumpet)도 있습니다. 독말풀이라고도 하는데, 땅을 향해 다소곳이 피는 천사의 나팔꽃과 달리 하늘에 도발이나 하는 듯 하늘을 향해 꼿꼿이 피어납니다. 그 꼿꼿함이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과 맞서려는 교만함으로 비추어졌던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나팔꽃 인생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시편 1:1)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을 땅에 엎드러뜨리시니"(시편 147:6)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할 것]"(시편 5:5)이라 했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잠언 3:34) 것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잠언 18:12)이기 때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구약성서를 이렇게 한 구절로 요약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신약의 서신들도 한결같이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야고보서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그렇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복음 11:2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 18:14, 마태복음 23:12) 가르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태복음 18:4)라고 하셨습니다.
한 영국 기자가 아프리카 아이들을 모아 줄을 세우고 반대쪽에 맛있는 딸기를 가득 채운 광주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딸기를 먹는 거야"라고 말한 후에 달리기 시합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몸집이 크거나 나이가 많은 아이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딸기에는 손도 대지 않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가 도착하니 그때 함께 딸기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기자가 신기해서 앞서 도착한 아이들에게 왜 먼저 먹지 않았냐고 물으니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으며 이렇게 합창하듯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우분투!" 남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철학이고 사상인 '우분투'(Ubuntu)는 '네가 있음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정신입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웃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이웃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나 혼자 내 능력으로 성공해서 모든 것을 독차지하겠다는 교만을 버리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조금만 눈을 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보면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힘으로 혼자 자랐다고 우쭐대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 예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대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오늘도 내가 숨 쉬고 살 수 있음은 수천, 수만 년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대자연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빚을 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이웃의 수고에 또한 빚진 자들입니다. 오늘의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에 꼭 필요한 건 겸손입니다. 겸손은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겸손은 신앙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겸손은 낮은 자리에서 다른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상생과 공존의 지혜이며 신앙과 영성의 실천입니다.
시로 시작한 오늘의 말씀을 시로 끝내고 싶습니다. 이기철 님의 《그렇게 하겠습니다》입니다. 능력주의 신화에 물들고 지친 우리에게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용기를 줍니다. 처음 읽은 시와 묘하게 공명합니다. "내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 내 밟고 온 길 /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성처받은 이 /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 사죄합니다 /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 강요했던 학생들에게 사죄합니다 //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 사죄합니다 /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 사죄합니다 //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맨 마지막 문장의 여운이 무척 깁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한 주도 이렇게 사죄하며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Aug 23, 2021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출처] 베리타스 기독교 인터넷신문
/ 2021.09.0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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