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가지만은 똑똑히 알고 있소. 내 땅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홍범도 장군 말씀)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주는 것이 독립군의 목적이요, 민족을 위하는 본의다.” (홍범도 장군 말씀)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 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이동순 시인)
■ 홍범도 장군의 귀환
“나는 무식하지만 한가지만은 똑똑히 안다. 내 땅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일본에게 우리의 땅을 점령당하는 바람에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모진 수난과 시련을 생각한다면 홍범도 장군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2021년 올해의 광복절은 우리 국민에게 특별한 광복절이 되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의 핵심 과제로 추진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애국지사 계봉우(1880∼1956)·황운정(1899~1989) 지사의 유해는 고국 땅을 밟았지만, 기대를 모았던 홍범도(1868~1943) 장군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광복절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돌아와서 정말로 반갑고 기뻤다. 그동안 여러 번 홍범도 장군을 소재로 한 기사를 작성했던 적이 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에 가려져 있던 그의 인생사에 마음이 아팠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에 앞서 의병 활동을 할 때였다. 홍범도 장군의 부인이 남편 대신 일본군에게 잡혀갔다. 투항 권고문을 쓰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부인이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영웅호걸이 아낙네가 이같이 어리석은 글을 쓴다고 굴복하리라 믿는가!”라며 오히려 호통을 치다가 일본군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그로부터 1개월 뒤 일본군과 교전 중에 아들 양순도 전사했다.
일본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홍범도 장군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그도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지만 일본군과 전쟁을 하느라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아마 속으론 애끓는 울음을 삼키고 또 삼키며 버텨냈을 것이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10월 대한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 일본군은 두려움에 떨면서 그를 ‘날으는 홍범도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37년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극장의 수위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에 생을 마감하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묻혔다. 1945년 조국은 해방을 맞았건만 6.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혼란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자연스레 머나먼 이국 땅에 묻힌 그의 존재도 잊혀져 갔다.
반면에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그는 영웅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존재는 세대를 초월해서 고려인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었다. 극작가 태장춘이 홍범도 장군의 활약을 소재로 한 ‘의병들’을 초연으로 무대에 올렸고, 홍범도 장군 사후 극본을 개정한 ‘홍범도’를 고려극장에서 공연했다.
한편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꾸준히 홍범도 장군을 기리면서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6월 7일 봉오동 전투 전승 기념 국민대회, 10월 25일 홍범도 장군 추모식 및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아직 홍범도 장군 기념관이 없지만 대신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누리집에 가면 홍범도 장군에 관한 많은 자료 및 기록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마치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기념관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동안 홍범도 장군 관련해서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지난 8월 14일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광복절인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카자흐스탄을 떠나 국내에 도착했다. 8월 16일과 17일 이틀간 국민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홍범도 장군 사후 78년 만에 그가 사랑했던 고국 땅에 묻힐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6일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의 부인인 단양 이 씨와 그 아들(홍양순)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올해 3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지금 국가보훈처 누리집에 가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국민추모 바로가기가 있다. 대전현충원에서 추모하기 어려우면 온라인으로 추모할 수 있다.
민관이 주도해서 우리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 묘역 비문에 새겨진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이라는 글귀에 주목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다시는 우리의 땅을 빼앗기지 않는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 그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돌아간 홍범도 장군과 모든 순국선열을 위한 우리의 보답이다.
글=정책기자단|윤혜숙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1.08.19
■ 문 대통령 “홍범도 장군의 귀환, 국민에 위기 극복의 희망”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 추모사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장군이 고향 흙에 흘린 눈물이 대한민국을 더 강하고 뜨거운 나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 오늘 마침내 고국산천에 몸을 누이신다”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01주년, 장군이 이역만리에서 세상을 떠나신 지 78년, 참으로 긴 세월이 걸렸다”고 언급했다. 이어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위해 적극 협력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고려인 동포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장군을 이곳에 모시며 선열들이 꿈꾸던 대한민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선조들의 고난을 뒤돌아보며 보란 듯이 잘사는 나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밝히고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 추모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내외 동포 여러분
3·1 독립운동의 정신 위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습니다.
그해 치러진 ‘독립전쟁 1회전’, ‘독립전쟁 첫 승리’라고 불렸던 봉오동 전투와, 독립전쟁 최대의 승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 오늘 마침내 고국산천에 몸을 누이십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01주년, 장군이 이역만리에서 세상을 떠나신 지 78년, 참으로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장군의 유해봉환을 위해 적극 협력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고려인 동포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장군이 안식을 취할 이곳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계십니다. 지난 2019년, 카자흐스탄에서 먼저 조국으로 돌아오신 황운정 지사 부부,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에서 싸웠던 이화일, 박승길 지사,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김운서, 이경재, 이장녕, 홍충희 지사가 잠들어 계십니다. 장군을 이곳에 모시며, 선열들이 꿈꾸던 대한민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승리와 희망의 역사’입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과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수십만 동포들이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만든 승리는, 나라를 잃은 굴종과 설움을 씻고, 일제 지배에 억압받던 삼천만 민족에게 강렬한 자존심과 자주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장군은 독립전쟁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망명지 연해주에서 17만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습니다. 1937년 9월, 극동에서 출발한 열차가 처음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였습니다. 당시 카자흐스탄도 대기근을 겪은 직후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 국민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꺼이 고려인 동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강인한 정신을 이어받은 고려인 동포 1세대는 정착 초기의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궈냈습니다. 척박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논농사를 시작하여 벼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끌어 올렸습니다.
장군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중앙아시아인들은 고려인들의 근면함에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고려인 동포들은 민족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지키면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모국어를 지키며 우리 문화와 예술을 이어갔고, 카자흐스탄에서만 460명의 석·박사, 68명의 노동 영웅, 150여 명의 공훈근로자를 비롯해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존경받는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습니다.
장군의 불굴의 무장투쟁은 강한 국방력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800톤급 잠수함 ‘홍범도 함’은 긍지와 함께 필승의 신념으로 동해 앞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2018년, 99주년 3·1절을 기념해 생도들이 훈련에 사용한 탄피 300kg으로 장군을 비롯한 독립 영웅들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세웠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의 숭고한 애국정신 위에서 대한민국은 종합군사력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으로 자주국방의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내외 동포 여러분
장군은 우리 민족 모두의 영웅이며, 자부심입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크즐오르다에 조성된 ‘홍범도 거리’와 공원 묘역을 찾고 있습니다. 정부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장군의 묘역 관리 등 고려인 사회의 자부심이 변함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조국을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까지 흘러가야 했던 장군을 비롯한 고려인 동포들의 고난의 삶 속에는 근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온갖 역경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절치부심해야 합니다. 선조들의 고난을 뒤돌아보며 보란 듯이 잘사는 나라,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밝히고,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그 시작일 것입니다.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많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으며,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가 많습니다.
열 권 분량의 대하 서사시를 완결한 바 있는 이동순 시인은, 이제야 긴 여행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장군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 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뤘고, 드디어 선진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장군이 고향 흙에 흘린 눈물이 대한민국을 더 강하고 뜨거운 나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1.08.18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최상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1·2·3·4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李千五)·강상모(姜相模)·강시범(姜時範)·조권식(曺權植)을 정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安武)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園)은 연대부 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작전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 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 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柔遠鎭)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따름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출처]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범도(洪範圖), 항일 독립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다
출생 1868년
사망 1943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했던 을미의병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 의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의병 활동이 국권수호의 성과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한일병합 이후 국외에서 펼쳐진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의병 출신들 중에는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해 해외 무장 투쟁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산포수(山砲手) 출신의 홍범도(洪範圖)는 항일 독립전쟁에서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린 투사였다.
홍범도는 1868년(고종 5)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다. 그는 20세가 되던 1887년(고종 24)에 평안우영 부대에 나팔수로 뽑혀 복무했으나 곧 탈영하였다. 그 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거나 제지소, 광산 등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고, 산에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대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러다 제천에서 밀려나 북상한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대와 연합해 관군과 싸웠다. 을미의병이 해산된 이후에는 북청(北靑), 풍산(豊山) 지역에서 산포수로 활동했다. 그는 화승총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워 포연대장에 뽑혔다. 이때 홍범도는 산포수들의 우두머리로서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07년(고종 44)에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함께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전국적으로 다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홍범도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동료 산포수들과 함께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된 산포수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이들은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함흥, 북청, 갑산 등 활동 지역의 지리에도 밝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의병대 중에 하나였다. 1907년(고종 44) 11월, 홍범도의 산포수 부대는 북청과 풍산 사이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일본군을 맞아 크게 이겼다. 또한 그해 12월에는 삼수(三水), 갑산(甲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홍범도의 의병대는 병력의 규모와 화력에서 일본군에게 뒤졌지만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는 유격전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홍범도 부대와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산포수 부대원의 가족들에게 접근해 협박과 회유로 의병대 내부의 분열을 꾀했다. 그 결과 차도선이 일본군에 귀순하고, 태양욱은 적에게 잡혀 고문 끝에 처형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홍범도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의병대를 독려해 또다시 일본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귀순했던 차도선도 탈출해 의병대에 다시 합류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이은 승리에도 홍범도의 의병대는 한계에 봉착하였다. 1909년(순종 3), 일본은 한국병탄을 목전에 두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의병 토벌에 나섰다. 그 바람에 홍범도 부대뿐만 아니라 다른 항일 의병들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홍범도는 유인석, 이범윤 등 다른 의병장들처럼 해외 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린 봉오동 전투
1910년(순종 4)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홍범도는 유인석 등과 함께 십삼도의군을 결성하는 등 해외 무장 투쟁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당장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만큼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우선은 무기와 신병 교육을 위한 자금 마련이 급선무였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와 광산, 농지 등에서 노동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 1919년에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독립군들도 활동을 재개했다. 홍범도는 북간도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200여 명의 대원과 함께 대한독립군을 결성했다. 대한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실로 오랜만에 전과를 올렸다. 한일병합 전부터 이루어진 한일 의병활동 중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이 올린 최초의 승리였다.
독립군의 기습 공격에 놀란 일본군은 국경 지역의 제19사단 수비대 병력으로 토벌대를 조직했다. 1920년 6월, 야스카와(安川二郞)가 이끄는 토벌대, 일명 월강추격대대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했다. 이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군,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등과 연합해 대한군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홍범도는 사령부장이 되어 야스카와 토벌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우선 공격 예상 지역인 봉오동(鳳梧洞)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4개의 중대를 요지마다 매복시켰다. 봉오동 골짜기로 적을 유인해 기습 공격으로 섬멸하겠다는 것이 홍범도의 계획이었다. 봉오동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에 위치한 골짜기로, 의병 시절부터 매복과 기습의 유격작전에 능했던 홍범도가 작전을 펼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일본군은 홍범도의 예상대로 봉오동 골짜기까지 밀고 들어왔다. 숨어서 적이 포위망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독립군 병력이 일시에 맹공을 퍼부었다.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였다. 일본군은 격전 3시간 만에 450여 명의 사상자가 나는 피해를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반면 독립군이 입은 피해는 경미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다.
홍범도가 직접 작성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한인 이함덕이 필사한 것으로 알려진 《홍범도의 일지》에서는 봉오동 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상자의 숫자 등이 전해지는 기록과 일부 다른데, 그것은 홍범도 자신이 본인의 전과를 다소 과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1920년 3월 초 3일(음력)에 무단봉에 나가 사흘 유숙하고 있다가 행군해 봉오골 최진동 진과 연합해 1920년 4월 초 3일 일병과 접전 일병 370명 죽고 저녁 편에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운무가 사람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게 끼었는데 일본 후원병 100여 명이 외성으로 그 높은 산 뒤로 영상에 올라서자 봉오골서 싸움하던 남은 군사 퇴진해 오던 길로 못가고 그 산으로 오르다가 신민단 군사 80명이 동쪽 산에 올랐다가 일병이 저희 있는 곳으로 당진하니까 내려다 총질하니 일병은 갈 곳이 없어 맞총질한즉 올라가는 철에 후병이 몇 명 죽으니까 속사포로 내려다 쏘니 신민단 군사 한 사람도 없이 죽고 일병이 수백 명 죽고 서로 코코(나팔) 소리 듣고 총소리 끊어졌다. 그때 왔던 일병이 오륙백 명 죽었다. - 《홍범도의 일지》
봉오동 전투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들이 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거둔 대승리였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사기가 오른 독립군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승리를 거두다
봉오동 전투에서 한껏 기세를 올린 홍범도의 부대는 이후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 한동안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인 김좌진(金佐鎭)의 업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범도 역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큰 전과를 올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인사들의 잘못된 증언으로 김좌진의 업적이 부풀려진 데서 온 오해였다.
사실 홍범도의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했고, 매번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래서 일본 토벌대는 홍범도의 부대에 대해 보복을 다짐하며 제1의 공격 대상으로 여겼다. 만주와 연해주에 연립해 있던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도 홍범도 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연합한 독립군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 봉오동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홍범도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어랑촌)로 이동해 갔다. 이때가 1920년 8월이었다. 이후 국민회군,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 등의 독립군 부대가 이도구 일대에 모여들었고, 그해 10월에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까지 합류했다.
한편 봉오동 전투의 패배에 잔뜩 약이 올라 있던 일본군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 1920년 10월 21일, 마침내 독립군 연합부대가 주둔 중이던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의 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부대가 일본의 야마다(山田) 부대를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날 김좌진은 천수평(泉水坪)에서도 연이어 승전보를 울렸다.
홍범도는 22일에 이도구 어랑촌에서 아즈마(東) 부대와 싸워 승전을 기록하고,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 고동하(古洞河)에서 마지막 혈전을 벌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토벌 의지를 접고 돌아갔다. 이로써 독립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던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이후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만주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토벌에 실패한 일본군이 만주의 독립군 근거지를 불태우고 거주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홍범도 역시 동료들과 함께 만주를 떠나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갔다.
◇ 중앙아시아에 잠든 독립전쟁의 영웅
1920년 말, 만주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던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와 연해주 접경 부분에서 다시 집결했다. 이곳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되었는데, 이때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이 총재를 맡고, 홍범도는 김좌진,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부총재를 맡게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에 러시아의 스보보드니(Svobodny), 즉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했다.
그런데 1921년 6월에 소련 공산당인 레닌 적군(Red Army)이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해 수많은 독립군이 사상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참변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역사 교과서는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이 레닌 적군을 도와 내전에 참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레닌 적군은 내전에서 승리하자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고, 이에 반발하는 독립군을 공격해 살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독립군단 내부에서 이르쿠츠크(노령)파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쪽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쪽이 서로 반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레닌 적군의 공격으로 독립군의 상당수가 죽거나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고, 살아남은 독립군들도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이후 그의 부대원 300명과 함께 레닌 적군에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는데, 그 이후로는 별다른 항일 무장 투쟁의 행적이 없다. 그는 1923년에 연해주 이남 구역인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37년에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자치공화국으로 이주했으며, 고려인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43년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홍범도는 뒤로 물러나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보다는 전장에 직접 나서 적과 맞서 싸우는 돌격대장 스타일에 더 가까웠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대신 나가 싸울 줄 아는 정의로움과 용맹함을 지닌 진정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글=이성무
[출처] 다음백과 명장열전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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