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제주여름여행] Day 3-2 암울한 시대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서귀포 '이중섭거리'를 찾아서 (2021.08.05)

푸레택 2021. 8. 5. 21:55

가족과 함께한 제주도 여름여행

2021.08.03(화)~2021.08 06(금)

◇ 셋째날 제주도 여행의 발자취

이어도성 숙소 출발~중문관광단지~박물관은살아있다 입구~여미지식물원~천제연폭포 후문~씨에스호텔앤리조트 옆 올레길~중문대포 주상절리대(천연기념물 제443호) 전망대~카페1950~고집돌우럭(식당)~이어도성숙소(휴식)~서귀포매일올레시장~할머니떡집(오메기떡)~이중섭거리~이중섭미술관~이중섭거주지~천주교서귀포성당~읍민관터~칠십리교~서귀포도립해양공원~천지연폭포 매표소~연외천~제주천지연담팔수자생지~천지연폭포~이어도성 숙소 도착(저녁)

○ Day 3-2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서귀포 이중섭거리를 찾아서 

제주여행 셋째날, 오전에 중문대포 해변을 찾아 파도 넘실대는 바다와 주상절리를 마음껏 구경하였다.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 제443호다.(Day 3-1에 기록) 여미지식물원 앞에 있는 카페1950에서 차를 한 잔 마신 후 중문관광단지 맛집으로 유명한 고집돌우럭에서 우럭조림과 옥돔구이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을 찾아 제주감귤 두 상자를 구입하여 택배로 부치고, 할머니떡집에서 제주의 별미 오메기떡을 구매했다. 매일올레시장 맞은편에 있는 이중섭거리와 이중섭거주지를 둘러본 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천지연폭포의 밤풍경을 감상하였다. 서귀포도립해상공원 내 천지연폭포 하천은 천연기념물 제27호 제주 무태장어 서식지로 지정되어 있다.(Day 3-3에 기록)

◇ 서귀포 이중섭거리’와 이중섭거주지

제주 사귀포시의 「이중섭거리」는 한국 최초로 화가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라고 한다. 돌하르방 이중섭과 만나다.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이중섭 거리엔 이중섭미술관과 서귀포극장이
있다. 그리고 제주감성소품점과 작은 공방들이 보인다.

△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봉화를 올렸던 '연디동산' 안내판

이중섭 거주지의 뒷동산에 연디동산이 있었다고 한다. 연디동산은 왜구들이 침입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연대를 세워 봉화를 올렸던 동산인데 1930년대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 이중섭이 살았던 서귀포 '이중섭 거주지'

◇ 불운한 시대를 살다간 천재화가 이중섭

흔히 이중섭 화가를 불운한 시대를 살다간 천재화가라고 부른다. 이중섭 거주지를 둘러보니 빈궁했던 그의 삶을 체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했고, 그가 41년의 생애를 마감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살아서는 그림 한 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 작품이 고가에 팔린들 그것이 이중섭 화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가 이중섭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다음백과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 한국 근대 서양화의 거목 이중섭(李仲燮)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불리며, 강인하고 굵은 선감의 화풍이 특징이다.

출생 1916년 04월 10일
사망 1956년 09월 06일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ㅡ 이중섭, 〈소의 말〉

소와 아이들을 즐겨 그린 화가, 화구를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여 담배를 싼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꼽히는 그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중섭 혹은 ‘소’ 그림이라고 하면 알 만큼 가장 대중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향(大鄕)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부농 집안이었으며, 그의 형도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이 때문에 이중섭이 청년 시절 순수하게 화가로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8세 때까지 마을의 한문 사숙에서 《동몽선습》, 《맹자》, 《논어》 등을 배우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중섭은 삼남매 중 막내로, 형, 누나와는 10여 살 이상 차이가 나서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했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림만 그렸다. 그런 그를 형이 나무라면 광에 숨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덕분에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아 보통학교 졸업 후 평양 고등보통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보통학교에서 이중섭은 당시 유화 화가였던 김찬영의 아들로 훗날 서양화가가 되는 김병기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서구 미술의 세계에 눈을 떴다. 김병기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유화 도구와 물감, 각종 서구 화집들을 접한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에 들어간 이중섭은 이곳에서 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임용련은 후기 인상파 경향의 화가로,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화가나 미술교사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이력이다. 색채와 조형의 기초, 구상 등을 중시하는 임용련 아래에서 중섭은 소묘와 에스키스(esquisse, 작품 구상이 담긴 초벌 그림) 등을 그리면서 기본기를 익혔으며, 후기 인상파 화풍도 접했다. 무엇보다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용련은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비해 수업 시간에 한글 자모를 이용한 구상화를 그리게 했다.

1936년,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임용련의 권유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타다 다치는 바람에 입학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림을 반대하는 형 때문에 집에 붙잡혀 있었다고도 한다. 1년 후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 입학한 이중섭은 이곳에서 친구인 김병기를 다시 만났고, 훗날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질 유영국, 북한의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날릴 문학수 등과 교유했다. 절친한 친구인 시인 구상도 이때 만났다.

이중섭은 문화학원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풍미하던 전위 미술에 강하게 끌렸다. 강인하고 굵은 선이 특징인 이중섭의 화풍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으며, 그는 학내에서 곧 동방의 조르주 루오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츠다 세이슈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일본 최초로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자유미술가협회를 결성한 인물이었다. 츠다는 이중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동양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중섭뿐이라고 격려했다. 이중섭은 그의 아래에서 문학수, 유영국, 안기풍 등과 함께 자유전에 그림을 출품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운동, 노래, 미술 등에 다재다능했던 이중섭은 학교 내 여학생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는데, 그중에는 후일 부인이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이중섭에게 화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선사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군국주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면서 사상과 예술 활동이 억압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때문에 프랑스 유학길도 막혔으며, 일본 내에서 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심해져 이중섭은 결국 1944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사코와 헤어지고, 화가로서의 길도 막힌 이중섭은 좌절하여 매일 들판에 나가 소를 그렸다. 그러나 이듬해 마사코가 전쟁의 포화를 뚫고 고향 원산(평원군)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다음 달 혼례를 치렀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향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가 이중섭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였다. 안정적인 생활은 잠시, 곧 북한 사회가 급속도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다시 고난이 시작되었다.

1946년, 사업가였던 형이 지주 계급으로 지목받아 처형되었고, 그에게는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정치 선전용 그림을 그리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예술을 혁명적 도구로 인식하는 공산주의 사회 체제에서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곧 퇴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당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친구인 구상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갔다. 이 무렵 이중섭은 첫아들인 태현을 병으로 잃는 개인적 슬픔도 겪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조카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섭은 종교 단체의 주선으로 제주도로 건너가 서귀포의 한 농가에 자리 잡았다. 미쓰이 물산 중역의 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마사코는 물론, 생업에 종사한 일 없이 순수하게 화가로서만 살아온 이중섭에게는 생활력이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활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피난민에게 나오는 배급을 받고, 마사코가 이삭을 줍고, 이중섭은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 근근이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은 아이들과 게, 물고기를 그리는 데 열중하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부두에 나가 막일을 하는 한편, 다방을 중심으로 화가들과 교류하며 단체전을 준비했다. 가족과 그림만이 생의 희망이었다.


1952년 7월,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기약 없는 피난민 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허전함으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함을 보다 못한 친구 구상이 이듬해 선원증을 구해 일본행을 주선했다. 그러나 일주일짜리 임시체류증이었던지라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패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사코의 집안 역시 어려웠기에 이중섭까지 받아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화가 전혁림, 작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의 배려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52년 12월에 한묵, 박고석, 손응성, 이봉상과 함께 기조전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4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통영의 성림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5년에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4년, 서울에 올라와 친구 집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하루에 빵 한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종이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 생활고, 가족을 떠나보낸 좌절감과 고독감은 점차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종종 기이한 행동을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거식증과 영양실조, 몇 차례의 탈출 소동 등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보다 못한 친구 한묵이 공기 좋은 곳에서 그를 곁에 두고 요양시키기로 결심하고 정릉 골짜기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런 노력에도 이중섭은 약 반 년 후인 1956년 초여름, 우울증과 폭음,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해 9월 6일에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반쪽이나마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김병기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인은 간장염이지만 그는 굶어 죽었대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다. 혹은 자살이라 해도 좋다. 이 사회가 예술은 소용없다 해도 그림만은 그린 것이요, 그림으로 세상이 안 먹여 준다면 안 먹겠다는 처절한 순도이었다.

[출처] 다음백과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 이중섭의 「소의 말」

한 평 남짓 이중섭이 거주했던 방에는 이중섭의 시 「소의 말」이 붙여져 있다. 최영록 시인의 해설로 그의 시를 감상해 본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그는 불과 41세로 요절하기까지 일제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사와 이름을 같이 했다. 그는 말년에 지독한 가난과 신병 그리고 고독 속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은박지 그림과 엽서그림을 그려냈다. 남다른 민족의식으로 그려낸 ‘소’ ‘황소’ ‘흰소’를 감상해 보시라. 동심의 천진난만한 세계를 그린 ‘물고기와 노는 아이’ ‘게와 아이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을 보라.

불꽃처럼 처절한 사랑 ‘남덕군’을 그리며 부인에게 보낸 엽서그림 90여장…. 그에게 있어 그림은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다. 그의 예술혼이 꽃을 피울 환경이 제대로 됐더라면, 오늘날 남아 있는 ‘명작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서귀포 한 골방(1평이나 될까?)에서 끔찍이도 사랑한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눈물범벅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들. 51년 피난지 서귀포의 방 벽에 덕지덕지 써 붙여놓았다는 그의 유일한 시. 천상 화가인 그가 시를 썼다 한다. 딱 한 편, 조카 이영진이 암송하여 전한다.

그의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 바로 ‘이중섭의 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다운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마치 윤동주의 ‘서시’를 보는 것같지 않은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는 보들레르, 릴케, 발레리, 베를렌느 등의 시를 애송했다고 한다.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천상 천상병같은 시인이 되었으리라.

필자는 어떤 졸시에서 그를 ‘천도적선(天桃謫仙)’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무릉도원에서 놀다가 ‘환쟁이’ 숙명을 띠고 이 땅에 유배온 신선이라는 뜻의 작명이었다. 도무지 한세상 살기가 어색했으리라. 단지 그림만을 그려 가장(家長)으로 한 집안을 꾸려가기에는 시대도 허락지 않았고, 그 자신도 적응할 수 없었으리라.

20여년 전 이중섭을 그린 영화가 있었다. 죽은 큰아들을 위하여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자 하염없이 울면서 ‘천도복숭아’를 그린 그림을 아들의 관에 넣어주는 장면이 실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특별전을 보면서 그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삼가 그의 불굴의 예술혼을 그린다. (글=최영록 시인)


◇ 신달자의 「편지2 - 이중섭 화가께」

신달자 시인이 1988년 시집 《새를 보면서》에 수록한 시 「편지2 - 이중섭 화가께」를 감상해 본다.

가슴에는 천도복숭아
엉덩이에는 사과가 익어 가는
내 아이는
지금 향내로 가득합니다
곧 연둣빛 싹도 살며시 돋고
계집아이 수줍음도 돋아나겠지만
내 아이는
더 자라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뛰어노는
당신의 아이들 속에
벌거벗은 채로
봄을 가지고 화평을 가지고
영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싶습니다
찢어진 은지 속에서도
아름다운 세상 만들며
순연한 부드러움

맑은 영혼 영혼으로ㅡ

ㅡ 시집 《새를 보면서》(1988) 수록


◇ 노향림 시인의 「그리운 서귀포 1」

노향림의 시 「그리운 서귀포 1」을 오승철 시인의 해설로 감상해 본다.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마른 갯벌엔 눈 감은 게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ㅡ 노향림의 「그리운 서귀포 1」 전문

노향림 시인의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에서 그리운 서귀포 연작을 선보였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강렬한 그리움으로 들어 있는데 화가 이중섭의 불우한 생애가 그려져 있다. 6.25 전후의 참혹한 상황에서 가진 것 없는 예술가가 제주에 왔다가 극심한 생활고로 아내의 친정인 일본으로 가족들을 보낸다. 그 그리움을 애틋한 그림엽서에 담아 보내지만 간염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그는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얼핏 이해가 어려운듯 하지만 이중섭의 눈으로 서귀포 바다를 시리게 바라보자. 멀리 중섭을 걱정하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리는게 보이지 않는가. (글=오승철 시인)

◇ 이중섭 화가의 생애 - 삶이 곧 예술

이중섭은 평탄치 않았던 생애로 인해 ‘비운의 화가’로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과 절망을 그림으로 해소하려는 듯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도원과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소 그림은 1930년대부터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데, 흰 소를 자주 그린 것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두 마리 소의 대결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준다. 또한 그에게 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갈등과 고통, 절망, 분노를 표현하고, 때로는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또한 소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적인 웃음과 인간적인 정감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자유분방한 선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가 그린 소 그림은 한 마디로 선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소의 동세를 표현한 것은 그의 거침없는 필선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담뱃갑 속에 든 은종이 위에 송곳이나 나무 펜으로 아이들이 물고기와 어우러져 노는 장면이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에서 살아있는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이중섭은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그의 삶 전체와 동일시된다. 그는 화가이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원동력이자 구원자였기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실하고 삶 전체가 오롯이 화폭 안에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본에 가 있는 가족에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다. 황소 위에는 구름이 떠 있다.”는 사연과 함께 《길 떠나는 가족》을 그려 보낸 일도 있다.

△ 부산시립극단 특별기획공연 '길 떠나는 가족 화가 이중섭'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안내 포스터

이중섭거주지를 둘러본 후 숲길을 조금 걸어 내려오니 작가의산책길에 이중섭 동상이 보인다. 한적한 곳에 세워져 있는 앉은 모습의 이중섭 화가와 함께 사진을 한장 찍었다.

◇ 식물학자 타케 신부와 왕벚나무

이중섭거리와 이중섭주거지를 둘러보고 천지연폭포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지연폭포로 가는 길에 문화와 전통의 마을 송산동에 위치한 천주교 서귀포성당을 잠시 둘러보았다. 성당에 세워져 있는 ‘식물학자 타케 신부와 왕벚나무라는 안내판이 관심을 끈다. 안내판에 서귀포성당 제3대 주임신부였던 타케 신부는 1908년 4월 15일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부근 해발 600m 지점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최초로 발견함으로써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을 확인하였다고 씌여 있다.

또한 안내판에는 “1902년~1915년까지 13년 동안 홍로본당(현 서귀포성당)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온주밀감나무을 도입하고, 우리나라 식물을 채집하여 세계 식물학계에 소개하여 제주의 가치를 빛낸 선각자 타케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산림과학원이 기준어미나무로 명명한 관음사 지구 왕벚나무에서 복제한 후계목을 심는다 라고 적혀있다.(2016년 4월 17일)

◇ 정방동 읍민관터’와 ‘뱃머리동산’

천주교 서귀포성당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읍민관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엔 읍민관은 서귀포 최초의 대중문화 시설로 영화도 상영하였으나 폐쇄되어 창고건물로 쓰이다가 지금은 완전히 없어져 그 터에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산책로와 농구코트가 조성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읍민관터 옆에는 예전에 어부나 그의 아낙네들이 자기 배가 들어왔는지 확인하였다 하여 붙여진 뱃머리동산이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 서귀포 서부두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뱃머리동산을 내려와 천지연폭포의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서귀포해양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Day 3-3에 기록)

/ 2021.08.05(목) 편집 사진=푸레 택


https://youtu.be/-Lhim9yzMK0

https://youtu.be/vc3DVQcZw5c


https://youtu.be/ctQ6Ct5nb3s

https://youtu.be/MjCgI0xAOMQ

https://blog.daum.net/mulpure/15856573

 

[제주여름여행] Day 1-2 저녁놀이 아름다운 제주 애월 한담해변, 장한철생가와 장한철산책로 (2021.0

■ 가족과 함께한 제주도 여름여행 2021.08.03(화)~2021.08.06(금) Day 1-2 애월 한담해변, 장한철산책로 ◇ 첫째날 제주도 여행의 발자취 김포공항(대한항공 KE1225)~제주공항~정개식당(갈치조림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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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름여행] Day 2-2 아름다운 제주, 신비한 쪽빛 바다 섬 속의 섬 '우도'를 찾아서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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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름여행] Day 4-3 에메랄드빛 바다 제주 협재해수욕장.. 저 멀리 비양도 (20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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