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야(前夜) / 안도현
늦게 입대하는 친구와 둘러앉아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소주잔에 고인 정든 시간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겨울밤
창 밖에는 희끗희끗
삐라 같은 첫 눈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남들이 스물 갓 넘어 부르던 군가를
꽃 피는 서른이 다되어 불러야 할 친구여,
식탁 가득 주둔 중인 접시들이 입 모아
최후의 만찬이 아니야 아니야
그래, 때가 되면 떠나는 것
까짓껏 누구나 때가 되면
소주를 마시며 모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려도
버려도 끝까지 우리 몸에 남는 것은
밥과 의무, 흉터들
제각기 숨가빴던 시절들을 등뒤로 감추고
입술 쓴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돌리노라면
옷소매 밑에 드러나는 부끄러운 흰 손목이여,
얼마나 많은 치욕이 우리의 두 손목을 적시며 흘러갔는지
늦은 친구가 머리를 깎으러 간 동안
주인공 없는 슬픈 영화 장면 속에서
우리는 노래 불렀다
학기도 부르고 종남이도 부르고
감출 수 없는 흥분만 고요히 이마에 서리고
우리는 더욱 쓸쓸해서
거푸 술잔을 비운다
이 밤, 젊고 그리운 서러움은 비로소
온 사방 함박눈으로 내려 쌓이고
별리(別離)의 흐린 담배 연기 속으로 돌아와
내일이면 병정이 되기 위하여
말없이 뒷모습 보여줄 친구여,
어느 시대의 은빛 투구를 씌워줄까
두터운 방패를 쥐여줄까
우리는 목구멍에다 눈물 같은 소주를 털어넣는다
● 초소에서 / 안도현
오래도록 서 있으면 고향이 보인다
해와 달 향하여 이 땅에 처음 울며 눈뜬 뒤
오늘은 다시 예감의 푸른 속눈썹 반짝이는
우리 서럽고 팔팔한 스물 두 살이 보인다
떨리는 손끝에 몇 덩이 둥근 무덤을 얹어두고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여기 와 있나
이상하게 말 안 듣는 내 팔다리여
저 녹슨 들판에 주름을 잡으며 밀려오는 겨울 저녁이여
조금만 참으라구 조금만
삼 년 동안 잔밥내를 입술에 적시고
그저께야 떠나간 제대병들의 얼룩 무늬 입김이
흰 꽃 눈송이로 뚝뚝 떨어지고 있구나
잠시 졸며 서서 꾸는 꿈도 우리는 고맙지만
흐린 꿈의 포대경(砲臺鏡) 속을 들여다보면
눈발 속에서 불도저에 이마를 말리는 한반도
우리나라 곳곳에 청년들은 산찔레 열매가 되어 흩어지고
모여서 더러는 악써 군가도 부르리라
보아라 까마귀떼가 눈보라를 피해
죽은 사람 따라 서서히 능선을 넘어가는 것을
아직도 마주 보고 서 있을 십리 밖의 친구여
찬 두려움 한입 가득 물고 나뭇잎 틈에 숨어
서로를 기다리는 우리는
곧 서둘러 달아나야 할 젊은 도마뱀
이토록 오래 서 있으면
가장 멀리 있다는 죽음의 땅도 보일까
어둠이 난로 곁으로 근무 시간을 바꿀 때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들 쓸쓸한 감시의 끝에 서성이던 고향에 대해
목숨보다 단단한 총구를 매만지며
스물 두 살의 초병(哨兵), 나는
● 비내리는 판문점 / 김문응 작사, 한동훈 작곡
원한 서린 휴전선에 밤은 깊은데
가신 님의 눈물이냐 비가 내린다
불켜진 병사에는 고향 꿈도 서러운 밤
가로 막힌 철조망엔 구름만이 넘는 구나
아아 판문점 비 내리는 판문점
산마루의 초소에는 밤새 우는데
가신 님의 눈물이냐 비가 내린다
저 멀리 기적 소리 고향꿈을 부르는 밤
가로막힌 삼팔선엔 바람만이 넘는구나
아 아 판문점 비 내리는 판문점
/ 2021.06.1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