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무지'는 무시무시한 형벌 '도모지'에서 유래
도무지는 ‘아무리 하여도 방법이 없다’는 뜻의 부사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을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형벌의 도모지(塗貌紙)에서 유래한다.
구한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보면 ‘도모지(塗貌紙)’라는 사형(私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자식이 엄격한 가정의 윤리 도덕을 어그러뜨리면 아비는 눈물을 머금고 그 자식에게 비밀리에 도모지(塗貌紙)라는 사형(私刑)을 내렸다고 한다.
도모지는 글자 그대로 얼굴에 종이를 바른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죄를 지은 자식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고 물을 묻힌 창호지를 얼굴에 몇 겹씩 착착 발라 놓으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종이가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는 죽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이처럼 도무지는 이런 끔찍한 형벌에서 비롯하여 전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변형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비슷한 말로 ‘도저히’가 있다. 그런데 ‘도무지’는 주로 부정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이며 ‘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라는 뜻이 있고, ‘도저히’ 또한 주로 부정 표현과 어울려 쓰이며 ‘아무리 하여도’라는 뜻이 있다. “그는 도저히 예의라고는 없는 사람이다”에서는 ‘도무지’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출처] 전북일보 ‘우리말 유래’ (2016.07.08)
■ 도모지(塗貌紙) / 송종복 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塗:도, 바르다 貌:모, 얼굴 紙:지, 종이」
도모지(塗貌紙)는 조선 시대에 주로 가문에서 행해졌던 사형(私刑)이다. 집안의 윤리를 어긴 자녀를 죽이기 위해 개인적으로 행해졌는데, 이를 천주교 박해에도 사용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가문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식을 부모가 눈물을 머금고 남몰래 죽이는 사형(私刑)을 ‘도모지’라고 했다. 이때 처형을 당하는 자를 기둥에 묶어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는 얼굴에 물 묻힌 딱 종이[韓紙]를 밀착해 여러 겹으로 쌓아 죽였다.
여러 장의 한지를 얼굴에 겹겹이 씌워서 물을 묻히면 숨이 막혀 죽는데, 이때 품는 물은 주로 막걸리이다. 막걸리는 입자가 미세해 한지의 구멍을 막아 숨을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지가 말라 조금 숨을 쉬면, 다시 물로 품어 숨이 막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번에 목숨을 끊지 않고 서서히 죽이는 방법이다. 참으로 냉혹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이런 행위는 아주 잔인하지만 간편하고 남몰래 소리 없이 죽이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다.
천주교 신앙은 가문(家門)의 재앙이었기에, 각 가문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도모지(塗貌紙)’라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발했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할 때, 천주교 믿는 가족을 집 기둥에 묶어두고, 얼굴[貌]에 종이[紙]를 바른[途]다. 몇 겹으로 바른 종이가 천천히 마르면 보지도 못하고, 숨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질식하고 만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은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모지형으로 죽였고, 1866년 병인사옥 때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를 많이 학살시켰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당하는데, 이때 廣州(광주) 유수가 이들을 ‘도모지형’으로 처형했다.
‘도모지’는 원래 가문의 윤리를 어긴 자를 죽이기 위해 사적(私的)으로 행하여 죽이는 방법인데, 이런 방법을 천주교 박해 때 많이 이용했다. 이러한 악습의 전통을 군사독재 시절 비슷한 방법으로 젖은 수건과 고춧가루, 그리고 주전자에 물을 부어 숨을 못 쉬도록 흘러내리게 하는 도모지가 변형돼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끔찍한 형벌인 ‘도모지’의 어원을 원용해 뭔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경우에 ‘도모지’ 대신에 ‘도무지’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요즘은 ‘도무지’가 또 변형돼 ‘절벽지’란 용어로 많이 쓰고 있다. 즉 3포절벽(①연애절벽, ②결혼절벽, ③출산절벽), 5포절벽(④사교절벽, ⑤취업절벽), 7포절벽(⑥주택구입절벽, ⑦희망절벽)이란 유행어가 등장한다. 시대가 각박해 ‘도모지’가 ‘도무지’로, 다시 ‘절벽지’로 변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출처] 경남매일 (2016.02.03)
■ 매천 황현 / 한기석
‘대원군 시절 살인에 염증을 느낀 포도청의 형졸들이 죄수의 얼굴에 백지 한 장을 붙이고 물을 뿌렸다. 죄수는 곧 숨이 막혀 죽었는데 이를 도모지라고 한다.’ 구한말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매천야록’에는 ‘도무지’라는 단어의 유래가 이렇게 나와 있다. 도모지(塗貌紙)는 조선시대 대역죄인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고안한 형벌로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쌓아두면 한지가 마르면서 코와 입에 달라붙어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국어사전에는 ‘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라고 풀이가 돼 있는데 유래를 알고 보니 뜻이 제대로 들어온다.
‘매천야록’을 쓴 매천 황현은 장수 황씨로 조상 중에 세종조의 명재상인 황희가 있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패한 조정을 참지 못하고 낙향해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이미 20대 때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할 만큼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 조선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한다.
절명시에는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했건만 그러질 못했다(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구나(今日眞成無可奈 )’라는 절구가 있다. 이 대목을 보면 그가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殉命·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림)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순명에 감동해 1914년 추모시 ‘매천 선생’을 지었다.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
동시대 사람인 시인 김택영의 황현 전기에는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의 유서가 소개돼 있다.
문화재청이 황현이 썼던 안경을 포함한 생활유물 35점과 벼루 등 문방구류 19점 등 2건을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등록 예고했다. 그는 갔어도 그의 문방사우는 남았으니 자결하던 그날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까. 특히나 일본의 도발이 심각한 요즘 그가 남긴 절명시처럼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는 생각이 많이 든다.
[출처] 서울경제 (2019.08.06)
/ 2021.06.02 편집 택
'[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양식] (2) 내 마음을 움직이는 명언.. 새 옷걸이 (2021.06.03) (0) | 2021.06.03 |
---|---|
[삶의 양식] (1) 마음을 움직이는 명언.. 나는 배웠다 (2021.06.03) (0) | 2021.06.03 |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숭고한 희생과 헌신, 나라 사랑의 큰길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2021.06.01) (0) | 2021.06.01 |
[New새소식] 남양주 청학계곡 정비 3년..비경이 돌아왔다 (2021.05.31) (0) | 2021.05.31 |
[New새소식] 영종도 미단시티 활성화 방안 (2021.05.30) (0) | 2021.05.30 |